[강원국의 어른 소통법] 가르침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
나이가 들수록 별 게 다 서운하다. 아들은 과묵한 편이라 집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걸어도 ‘예’ 또는 ‘아니요’로만 대답한다. 하긴 나도 그 나이 땐 그랬지 하면서 이해했다. 그러다 아들이 결혼했다. 며느리와 함께 집에 들를 때마다 전혀 다른 아들의 모습을 본다. 자기 아내와는 어찌 그리 말을 잘하는지, 부모 앞에서 인상만 쓰던 애가 웃음은 또 얼마나 헤픈지, 배신감마저 들 정도다.

말 나온 김에 오래전 이야기 하나 더 해야겠다. 말수가 적은 아들이 엄마와는 제법 말을 잘한다. 부탁할 일이 있거나 속내 털어놓을 일이 있으면 주로 엄마에게 얘기한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아들이 심각한 얼굴로 아내에게 고민이 있다고 말을 꺼냈다. 아내가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신체에 관한 것’이라며 마음이 정리되면 얘기하겠다고 했다. 몸의 문제라면 같은 남자인 아빠에게 얘기하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으로 다음 날 아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 “학교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요.”
제 딴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게임 때문에 눈이 나빠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에게 혼날 게 무서웠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났지만, 그런 얘기를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아빠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대화가 필요해
자녀들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중년이 늘고 있다. 우리가 자랐던 시대의 소통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아이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부모는 대화할 때 경험과 가르침을 이야기하려 하고, 자녀 세대는 공감과 존중을 원한다. 갈등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부모’와 ‘듣고 싶은 자녀’의 생각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생긴다. 그러다 보니 결국 대화는 이어지지 못한 채 부모는 섭섭함을, 자녀는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 세대는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라고 여기며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면 돈을 버는 지위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생물학적 역할만 덩그러니 남는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과 사회적 지위는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직장 다닐 때 직함은 단순한 업무상 역할을 넘어 자아 정체성의 핵심 부분이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은퇴가 다가오면 이런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 이에 반해 아버지 역할은 별로 해본 적 없고 잘하지도 못한다. 아버지로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어느 날 슈퍼맨 옷 갈아입듯 순간적으로 변신해서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거듭나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나이 들면서 새로운 환경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는 느려지는 반면, 기존에 축적되고 익숙한 지식과 경험에 관한 확신은 강해진다. 이를 ‘인지적 폐쇄성(Cognitive Closure)’이라고 하는데, 불확실함을 피하고 기존 신념을 확인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 소통 방법
그즈음에는 자식들도 다 커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더 큰 목소리를 낸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은 힘이 없을 때 더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평생 쌓아온 것들이 부정당한다고 느낄 때 더 강하게 자기 방식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어적 태도가 소통의 벽을 더 높이고, 자식 세대와의 거리를 더욱 벌려놓는다.
어느덧 성인이 된 자녀들은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다. 그들만의 세계와 생각,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예전처럼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보호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요즘 나는 아들과의 소통을 위해 몇 가지 다짐한 게 있다. 그 첫 번째가 ‘감정에 솔직해지자’는 것이다. 아들 내외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겉으로는 ‘안 와도 된다, 오지 마라’, 가족 식사할 때 ‘너희들 먹고 싶은 데로 가자. 나는 어디든 상관없다’ 이런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오히려 내 감정을 그때그때 잘 알려주자.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분명하게 말하자. 그래서 나를 알 수 있게 하자. 그래야 자녀들도 나를 예측할 수 있고,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지 않겠나. 불편한 감정을 꽁꽁 묻어뒀다가 어느 순간 폭발시키면 자녀들이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소통 전문가 박재연 씨는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란 책에서 “자신의 욕구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아준다. 서로에게 더 명확한 요구를 전달하고 자신의 바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관계가 더 건강해진다”고 조언한다.
두 번째 다짐은 ‘할 말은 하자’는 것이다. “아빠는 또 그 얘기야. 맨날 그 말만 해!” 자녀와 대화하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려고 던진 말이 순식간에 잔소리로 치부되곤 한다. 내 경험담을 풀어놓는 순간, 아들은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기 일쑤다.

‘이제부터 할 말은 하겠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는 자녀와의 관계를 위해 말을 아끼거나, 갈등을 피하려고 참아왔던 속마음을 이제는 꾸밈없이 표현하고 싶다는 뜻이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기대하는 부분, 또는 자녀의 행동에 대한 염려 등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는 자녀와의 관계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하는 동등한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세 번째는 ‘경직된 생각과 태도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살아온 세월만큼 경험이 쌓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사고의 경직성을 가져오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일방적인 강요로 들리고, 권위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다.
우리는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서열이 분명한 사회에서 자랐다. 윗사람 말에 토 달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수평적 소통과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자란 자식 세대는 답보다 과정을 궁금해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 근거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들에게는 인공지능이 있다. 답은 유튜브가 알려준다. 궁금하면 바로 검색해서 확인한다.
자녀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는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해줘야 한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넌 왜 아직도 결혼 안 하니?”, “취업은 언제 할 거니?” 같은 질문은 자녀에게 압박감만 줄 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믿어줘야 한다. 궁금한 점이 있어도 캐묻기보다는, 자녀가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동반자적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내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함께 배워나간다’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경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이 속속 등장한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 변화하는 사회 트렌드에서는 자식 세대가 더 앞서 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질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끝으로 ‘자식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세대가 성장한 시기와 지금의 자식 세대가 살아가는 환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치관과 소통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 세대는 관계를 돈독히 해야 일이 잘 풀린다고 배웠다. 개인적인 안부를 묻고, 밥 한 끼 같이하며 신뢰를 다졌다. 업무 외적인 교류를 통해 정을 나누고,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일도 더 원활하게 진행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면 소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식 세대는 다르다. 업무와 사생활을 분리하고, 필요한 만큼만 소통한다. 개인적인 질문이나 관심을 불편해한다. 효율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우리의 친절이 오히려 간섭으로 비칠 때가 많다. 정보 습득과 판단 방식도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자식 세대는 검색과 데이터를 통한 확인을 중시한다. 우리는 도우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공감이다. 가르침이 아니라 대화다.
소통에도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자녀와의 대화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꾸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하기보다 자녀와 함께 성장하는 부모가 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리의 경험과 지혜는 여전히 소중하다. 젊은이들도 우리가 필요하다. 그들에게도 우리의 경험이 도움이 된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시대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오랜 습관을 바꾸는 것이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자녀와의 대화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자녀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듣기, 자녀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 함께 보기, 젊은 세대 노래 들어보기, 자녀가 자주 쓰는 표현의 의미 물어보기, 사소한 결정권은 자녀에게 맡기기 등. 이런 작은 시도 자체가 소통의 시작이다. 이런 것들이 쌓여 세대 간 관계의 물꼬를 트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어른의 역할 아니겠는가.
자녀와의 관계는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서로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다. 부모의 따뜻한 관심과 존중, 그리고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는 용기만 있다면 자녀는 언제든지 부모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 당장 자녀에게 말 한마디 걸어보는 건 어떨까?
소통을 위한 다짐➊ 불편한 감정을 꽁꽁 묻어뒀다 폭발시키면 좋을 것 없으니 감정에 솔직해지자.➋ 갈등 피하려고 참지 말고, 잔소리 같아도 할 말은 하자.
➌ 일방적인 강요로 들리고, 권위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는 경직된 생각과 태도에서 벗어나자.
➍ 부모가 성장한 시기와 지금은 살아가는 환경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 자식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힘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