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아셈노인인권’ 국제포럼… 연령차별 극복위한 방안 모색

연령주의(ageism)의 해소를 위해 서울에 모인 석학들은 나이를 기준으로 한 차별 해소를 위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내제화’와 이로 인한 ‘차별적 언어’를 근본적인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이들은 연령차별 해소를 위한 핵심 과제로 ‘언어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정책 형성이 일상 언어와 프레이밍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제도 개선을 넘어 말과 표현을 바꾸는 작업이 차별 극복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ASEM Global Ageing Center, AGAC)가 주최한 ‘제5차 아셈노인인권: 현실과 대안’ 국제포럼이 20일 서울 종로구 서머셋팰리스에서 열렸다. 국가인권위원회, 주한유럽연합대표부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온·오프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됐으며, 노인에 대한 연령차별의 근원과 구조를 분석하고 극복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올해 포럼의 주제는 ‘연령주의를 조명하다: 문화적 현실, 구조적 장벽, 그리고 변화의 길’이다. 연령주의(ageism)는 노년학자 로버트 버틀러가 1969년 제시한 개념으로, 사회와 제도에 깊게 뿌리내린 고정관념과 차별을 뜻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은 이를 인권 침해이자 지속가능발전을 저해하는 글로벌 과제로 규정하고 있다.
개회식에서는 이혜경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 원장,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즈 주한 EU 대사가 환영사를 전했다. 이어 이학영 국회부의장과 베아타 스토친스카 아시아·유럽재단 사무총장, 산 륀 아세안 사회문화공동체 사무차장이 축사를 통해 연령차별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UN 노인인권 독립전문가 클라우디아 말러는 기조연설에서 “연령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구조적 문제”라며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했다.
고령화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언론도 문제
포럼에서는 연령차별 해소를 위한 언어 재구성 문제가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논의됐다. 참가자들은 노인에 대한 언어와 프레이밍이 사회적 인식과 정책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언어 사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린느 크라소비츠키 박사는 호주 사례를 들어 “50세 이상 노동자가 사회적 규범 속에서 ‘부담’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 개입을 통해 연령주의적 태도가 줄고 언어 사용이 변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태도와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언론이 노인을 폄하하거나 세대 갈등의 주범으로 조명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언론과의 협업을 통한 언어 재설계와 인식 개선 캠페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말린느 크라소비츠키 박사는 호주의 반 연령주의 캠페인 에브리 에이지 카운츠(EveryAGE Counts, 모든 연령이 중요하다)의 이사이자 WHO 연령주의 종식 캠페인 컨설턴트로 활약한 바 있는 인물이다.
실비아 페렐-레빈 제네바 고령화 NGO위원회 부의장은 “‘고령화 쓰나미’, ‘고령화 시한폭탄’ 같은 표현은 연령주의를 정당화하는 언어”라며 사용 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인구 고령화를 위협으로 보는 대신 “증거 기반의 인간 중심 정책을 통한 인구통계학적 회복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유럽에서 확산된 ‘공정성’ 담론이 세대 갈등을 조장할 위험을 지적하며, “노인의 권리와 존엄성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제는 금기가 상식이 된 성차별적 발언을 예를 들며, “연령주의적 발언 역시 금기시 되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욜란타 비아우아스 폴란드 비스프와스키대 교수는 유럽 상황을 소개하며, EU 차원의 동등 대우 협약 논의와 고용정책 개혁 흐름을 전했다. 그는 유로바로미터 조사 결과를 인용해 “유럽인의 45%가 연령차별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인식하고, 절반 가까이가 채용 과정에서 나이 차별을 경험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어 “연령주의 문제는 단일 해법이 없고, 잘못된 접근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며 다양한 지역 맞춤형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주현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지적하며 ‘성공적 노화’ 담론이 생산성과 능력 중심 가치와 결합해 노년기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청소년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단순한 인식 개선을 넘어 행동 변화를 목표로 설계돼야 한다”고 제언하며, 구체적 세대 간 교류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포럼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연령주의 극복은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언어 사용과 인식 구조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언어 재설계, 세대 간 상호작용 확대, 미디어 캠페인 등을 통해 노인을 능동적 행위자이자 동등한 권리 보유자로 바라보는 사회적 전환이 시급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연령주의는 구조적 차별… 정책·제도 전환 시급”
또한 포럼에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개발한 연령주의 척도를 포함해 보건·고용 등 핵심 분야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차별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알라나 오피서 WHO 인구변화 및 건강한 노화 부서장은 “연령주의는 특정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연령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차별”이라며 건강·사회·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책·법률, 교육, 세대 간 교류를 통한 종합적 감소 전략과 함께 WHO 연령주의 척도의 활용 필요성을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민간연금관리청 의장이자 말레이사이 푸트라대 교수인 텡쿠 아이잔 빈티 텡구 압둘 하미드는 “동남아시아는 고령화 속도에 비해 제도적 대응이 뒤처져 있다”며 보건과 고용 전반에서 연령차별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노년을 가치 있는 생애 단계로 재정의하고 반연령차별 원칙을 정책에 반영해야 하며, 포용적 고용과 세대 간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수영 고려대 고령사회연구원 특임교수는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과 맞물려 심화되는 노동시장 내 차별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공정채용 강화 △임금체계 개편 △직업훈련 확대 등 종합적 고용정책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령자 무급 노동의 가치, 사회적 합의 있어야
그리고 연령주의 극복을 위한 실천 전략도 논의됐다. 참가자들은 세대 간 연대, 교육 캠페인, 제도 개혁 등 다층적 접근을 통해 ‘연령포용적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카이 라이셰링 유럽사회복지정책연구센터 원장은 고령화를 위기에서 기회로 전환하는 ‘에이징(Ageing) 4.0’ 모델을 제안했다. 그는 교육·노동·돌봄·여가가 유연하게 결합된 체계 속에서 구조적 장벽 제거, 세대 간 교류 확대, 평생학습·재훈련 보장, 성별 격차 해소와 무급 돌봄노동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앗니끄 노바 씨기로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인도네시아 노인의 다수는 비공식 부문 종사자로 연금·사회보장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권리 기반의 강제적 법·제도 정비와 집행 메커니즘 구축을 촉구했다. 그는 “연령차별 금지 법제가 부재한 현실이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솜삭 악실 아세안 활동적 고령화 혁신센터 대표는 “아세안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지만, 법·제도·서비스의 노인 포용성이 여전히 낮다”고 평가했다. 그는 연령친화 도시와 스마트시티 조성, 디지털 자가관리 플랫폼 구축, 데이터 기반 정책 설계 등을 포함한 다각적 전략을 소개했다.
이혜경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 원장은 행사를 마무리 하면서, “연령주의는 단순한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노인의 기회와 존엄을 저해하고 사회의 불공정성을 심화시키는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라며 “이는 일터뿐 아니라 보건, 주거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노인은 돌봄의 대상이자 취약한 집단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면서, “나이 듦을 둘러싼 고정관념과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