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반보기 문화의 의미

여름의 끝자락, 8월이다. 아직은 한낮의 햇살이 강하지만, 아침저녁의 공기엔 벌써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들녘 곡식은 무르익어가고, 나무는 천천히 잎을 익히며 변화의 시기를 준비한다. 자연이 그렇게 계절의 전환을 맞이하듯,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 시기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면 어떤 마음으로 8월을 살아야 할까?
우리 선조들은 8월을 그저 ‘더위의 끝’이라 여기지 않았다. 농사짓는 큰 고비를 넘긴 뒤, 숨을 고르고 관계를 돌아보는 달로 삼았다. 특히 농촌 여성들에게 8월은 특별한 달이었다. 시집살이로 친정을 쉽게 오갈 수 없었던 며느리들이 농사일이 조금 한가해지는 이 무렵, 친정 식구들과 ‘반보기’를 했다. 시댁과 친정 중간지점에서 만나 싸 온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과 눈물을 섞어 하루를 보냈다. 한자로는 ‘중로상봉(中路相逢)’이다.
이 반보기 문화는 가족 간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바쁜 일상에 미뤄두었던 소중한 관계를 다시금 잇고, 마음을 회복하는 일종의 ‘정서적 추수’였던 셈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반보기는 유효하다. 마음의 중간지점에서 그간 뜸했던 벗이나 가족에게 먼저 안부를 묻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여름 잘 견디셨나요?”라는 짧은 말로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일지 모른다.
8월은 인생으로 치면 성숙한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와 닮았다. 봄처럼 새롭진 않지만, 여름처럼 치열하지도 않다. 대신 이제껏 살아온 시간의 결실을 가만히 바라보고,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나이 든 이들에게 8월은 결실을 되새기고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달이어야 한다.
이 시기를 건강하게, 또 의미 있게 보내려면, 먼저 ‘관계의 온기’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하면 좋다. 그동안 연락 못 한 친구에게 전화 한 통, 오래된 사진 한 장 꺼내며 그리움을 전하는 문자 하나라도 좋다.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식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두면 시들어간다. 마음의 문을 다시 열고 함께 웃고 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인생의 수확이다. 시니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을 성취할까’보다 ‘어떻게 의미 있게 살까’를 고민하는 일이므로, 작은 실천들이 곧 삶의 질이 된다.
선인들은 말년의 삶을 ‘여백의 미’라 했다.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고,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택하며, 자신과 화해하는 시간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고요한 미소와 깊은 눈빛이 깃들 수 있었다. 오늘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그 어떤 열매보다 풍성한 8월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위가 지나간 들판처럼 우리의 삶도 이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결실을 준비할 시간이다. 인생의 8월, 당신은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