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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소년·소녀 찾기” 시니어 시 쓰기, 어렵지 않다

기사입력 2025-06-19 08:00

이정록 시인과 알아본 시 짓는 법

▲이정록 시인과 ‘시화 교실’ 수업을 들은 어르신들.(이정록 시인)
▲이정록 시인과 ‘시화 교실’ 수업을 들은 어르신들.(이정록 시인)

‘시 한 편 지어보고 싶다.’ 이 마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온다. 다만 문제는 막막함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시는 결코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긴 생을 살아낸 이들에게 시는 가장 가까운 언어다.

‘80이 너머도/ 어무이가 조타/ 나이가 드러도 어무이가 보고시따/ 어무이 카고 부르마/ 아이고 오이야 오이야/ 이래 방가따’

지난해 11월 경북 칠곡 할머니들이 쓴 시와 그림 네 편이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화제를 모았다. 2013년 칠곡군의 성인 문해 교육에 참여해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언어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시가 되었다. 이들의 시는 소박하고도 진한 울림을 남겼다.

첫 번째 시집 ‘시가 뭐고’는 출간 2주 만에 1000부가 완판됐으며, 이후 4권까지 이어졌다. 또한 ‘칠곡 할매체’라는 서체가 제작됐으며, 할머니 일부는 ‘수니와 칠공주’라는 랩 그룹을 결성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태주풀꽃문학관.(주민욱 프리랜서)
▲나태주풀꽃문학관.(주민욱 프리랜서)

▲시민과 문학관에서 교류하는 정호승 시인.(정호승문학관)
▲시민과 문학관에서 교류하는 정호승 시인.(정호승문학관)

시 창작이 바꾸는 시니어의 삶

시니어가 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열려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는 평생교육센터나 노인복지관을 통해 시 창작반, 문해교실 등을 운영한다. 문학적 배경이 없는 이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짧은 시 쓰기, 기억 회상 글쓰기, 자화상 시 등 체험형 수업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의 수업은 전문 시인이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감정과 기억의 발굴에 초점을 맞춘다.

공공도서관, 문화원, 지역 문학관 역시 시 창작 교육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윤동주, 김유정, 이육사, 기형도 등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들은 정기적으로 시 창작 수업을 열며, 지역 주민과 문학을 연결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곳에서 첫 시집을 준비하는 시니어 수강생도 적지 않다.

현역 시인이 직접 운영하는 문학관에서는 좀 더 밀도 높은 문학적 체험이 가능하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정호승 시인의 문학관은 2023년 대구 수성구에 개관했다. 이곳에서는 시 창작 수업은 물론, 정 시인이 시민과 직접 교류하는 문학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강의는 단지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는 삶의 그늘 속에서 피어난다”는 정 시인의 말처럼, 참가자들은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며 언어로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충남 공주에 자리한 나태주풀꽃문학관도 빼놓을 수 없다. 나 시인의 대표작과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된 문학관은 시인의 철학과 감성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이곳에서는 ‘풀꽃문학상’ 공모전을 비롯해 다양하고 의미 있는 문학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리며, 문학관 옆에는 ‘나태주 문학창작 플랫폼’이 새로 조성될 예정이다. 좀 더 넓은 교육 공간이 확보되면서, 시 교육은 물론 시문학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최근에는 글쓰기 수업이 단순한 창작의 기술을 넘어 정서적 돌봄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몇몇 문학관과 복지기관은 우울감, 상실, 트라우마를 겪은 노년층을 대상으로 ‘치유 글쓰기’ 또는 ‘자전적 시 쓰기’ 수업을 시범 운영 중이다. 또한 시 창작 프로그램은 점차 개별 맞춤형, 장기적 과정으로 진화하고 있다. 단기 특강뿐 아니라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연중반과 창작 동아리 연계 프로그램이 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공모전 출품까지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문해력 향상이라는 1차적 목표를 넘어, 시니어의 문학적 자아실현을 돕는 기반이 좀 더 탄탄하게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이정록 시인)
(이정록 시인)

당신 안의 시인을 깨우는 법

‘의자’라는 시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이름을 올린 이정록 시인이 최근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시니어를 위한 시 창작 교육이다. 지난해에는 천안시가 주관한 ‘마을공동체축제지원사업’에 참여해, 읍면리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시화 교실 ‘아름다운 나를 찾아서’를 운영했다. 수업은 총 6시간, 2시간씩 3회에 걸쳐 진행됐으며, 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독창적인 커리큘럼은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정록 시인은 ‘명패 만들기’부터 제안한다. 도화지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그 옆에 자화상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이름 위에 ‘○○○가 되고 싶었던’ 혹은 ‘○○○가 되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적는다. 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잊고 지냈던 꿈을 소환하는 시간이다. 그 과정은 자연스레 잊고 지냈던 꿈을 되새기게 하며, 자기 인생을 정리하고 마주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감정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린다. 살면서 기뻤던 순간, 힘들었던 기억을 돌아보고, 이름 아래 ‘○○○가 되었다’라는 문장을 덧붙인다. 그 문장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살아온 삶에 대한 작지만 깊은 고백이 된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 엄마가 되었다”,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다. 현모양처가 되어 행복하다”,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농사꾼이 되었다” 등은 실제 어르신들이 쓴 문장이다.

이정록 시인은 “삶을 돌아보는 작업 중에 눈물 흘리는 분이 많다”면서 “이 짧은 두 문장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바로 감정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런 감정의 채집은 곧 시 창작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시를 어려워하던 어르신들도 자신의 인생을 언어로 풀어내며, 한줄 한줄 시로 기록해나간다. 이정록 시인은 “시니어는 인생의 대서사시를 품고 있는 고귀한 존재”라면서 시를 쓰기에 앞서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아이들 키우랴, 일하랴, 바쁘게 살아온 모든 시니어에게는 오랫동안 묻어둔 꿈과 감정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를 통해 그동안 외롭게 방치해온 내면의 소년과 소녀를 다시 어루만져보세요. 삶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시 안에 있습니다.”

Interview

이정록 시인 “삶의 모든 순간이 시였다”

“돌이켜보면 제 삶의 모든 것이 저를 시인으로 이끈 것 같아요.”

이정록 시인은 자신의 삶을 되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인으로서 꾸준히 창작을 이어온 동시에, 한문 교사로 37년간 교단에 섰다. 2022년 정년 퇴임 후에는 매일 이야기발명연구소로 출근해 시를 연구하고 있다.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여섯 살에 조기 입학했다. 또래보다 느리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늘 뒤처졌고 소외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터라 땅바닥에 뭘 그렸고, 하늘을 쳐다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고 회고하며, 그 시절의 결핍이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고 말한다.

문학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 스승의 날 백일장에서 비롯됐다. ‘감사할 게 없다’며 스승을 원망하는 글을 썼지만, 뜻밖에도 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는 ‘무궁화를 사랑하는 방법’ 백일장에서 생애 첫 창작의 감동을 느꼈고, 그 경험은 지금까지 그를 시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 쓴 글을 누군가가 칭찬해줬고, 또 그 글이 제 자신을 위로했어요. 그 순간 시는 삶을 건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은 그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학교에 진학한 터라 응시 자격이 되지 않았고, 우연찮게 공주사범대에 진학한다. 그는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고, 졸업 후 한문 교사로 일하며 신춘문예에 꾸준히 응모했다.

“대전일보 신춘문예 등단 이후, 한길사에서 펴내는 문학잡지 ‘한길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았죠. 시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날 출판사를 찾아갔는데, 제 원고가 캐비닛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알게 된 거죠. 눈물을 삼키며 원고를 회수해온 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재도전했습니다.”

이정록 시인이 여러 차례 등단한 이유다. 때마침 안도현 시인이 제안을 해와 그는 문학동네 세 번째 시인으로 시집을 냈다. 바로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1994)다.

이후 이정록 시인은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서정시의 대가다. 그의 시에는 고향 충남 홍성의 향기와 그리움이 가득하다. 시어는 자연과 가족에서 나오며, 삶의 유머와 따뜻함이 배어 있다.

“2012년에 나온 ‘어머니 학교’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은 대로 시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서운하실까 싶어 ‘아버지 학교’를 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시절을 반성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시의 젖줄이 되어주시는 아버지, 어머니가 없었다면 저는 시인이 되지 못했겠지요.”

이정록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산골로 가야 한다며, “시골 어르신들은 모두 우리 어머니 같은 심성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자연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둥글둥글해진 분들이다. 그분들과 얘기를 나누면 성당 고해소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현재 시인은 산골 시내버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사람 이야기를 담뿍 담아낸 ‘시내버스 학교’란 시집과 시니어의 사랑을 노래한 100세 그림책 ‘참 빨랐지 그 양반’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시집을 묻자,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나오지 않은, 다음 시집입니다.”

#시쓰기 #작가 #시인 #시니어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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