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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보는 봄날의 꽃들

기사입력 2025-06-26 08:00

[민간정원 순례] 충북 충주시 우림정원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우림정원엔 볼 만한 게 많다. 정원 초입에 있는 냇물부터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낮고 수줍은 물결이 윤슬을 반짝이며 흘러간다. 정원을 보러 왔다가 저 곱살한 물길의 행선지가 궁금해 둑을 따라 그만 먼 곳으로 걸어간 사람도 있으리라.

정원으로 들어선다.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를 지나 산책길로 접어들자 일변 숲의 피톤치드가 훅 끼쳐온다. 소로 양쪽엔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해 있다. 저만치엔 그 거목들이 연출한 소실점이 아른거려 살짝 드라마틱하다. 매정하게 가뭇없이 멀어진 정인 하나쯤 호명해보라고 만들어놓은 길일지도 모른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정원은 그지없이 싱그럽다. 바야흐로 봄의 한복판에 들어선 식물들이 활개를 친다. 잎잎이 순도 높은 초록을 길어 올리고, 꽃들은 우르르 피어 향기를 풍긴다. 대목을 만난 벌과 나비들도 오일장의 장돌뱅이처럼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어디를 보더라도 눈에 쏙 들어오는 정경이다. 보고 즐기기에 좋아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봄이라는 최적의 생존조건을 한 점 낭비 없이 쓰고자 최선을 다하는 나무들의 치열성이 느껴져 더 아름답다. “야야, 봄이 또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나?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합의한 것처럼, 나무들이 일제히 격렬한 에너지를 쏟아내는 게 아닌가.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식물은 자연을 연주하는 조물주의 가락에 장단을 맞출 줄 아는 귀재다. 봄날의 생기, 천지간에 가득한 기운생동은 필시 나무들의 독창적인 재능에 의한 산물일 테다. 태고 이래 나무들은 겸손한 태도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길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연의 시그니처가 됐다. 지구의 환경과 운명을 움직이는 진정한 권좌에 등극했다. 이렇게 나무들의 클래스가 높다. 물론 사람도 원래 고귀한 자연이다. 그러나 한물간 생선처럼 퇴색해 영 맛이 나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 정원은 산허리에 들어앉아 꽤 웅숭깊은 멋을 풍긴다. 수목들은 다양하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져 번잡하지 않다. 화장기 없는 소박한 꾸밈새와 푸근한 분위기 역시 마음을 쉬어가게 한다. 풀숲에 털퍼덕 주저앉아 한가롭게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게 한다. 아이 때 천진난만하게 뛰놀았던 시골의 외갓집 뒷동산마냥 정겨운 구석이 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정원주는 노부부다. 일찍이 언젠간 산에 살기로 언약한 바 있었던 그들은 마침내 황혼이 오기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그러고선 농사를 짓는 한편 부지런히 나무와 화초를 길렀다. 땀을 쏟는 정도가 아니라 방울방울 피를 뿜다시피 온 힘을 다해 산중 화원을 가꾸었다.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야산을 누벼 정원 한 벌을 만들었다. 늘그막의 허탈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세상엔 이런 사랑도 있는 법이다. 커피가 식는 속도보다 빠르게 저무는 사랑이 흔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은 다정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부부의 동향을 오래 주시한 나무들은 알고 있으리라. 나무를 가꾸며 그들이 보너스로 얻은 마음의 천국을.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천국은 다른 곳에도 있다. 슬픔이나 아픔은 사라지고 다만 웃음이 넘치는 곳을 천국이라 한다면, 만화방창한 봄날의 정원 역시 천국이다. 봄꽃들을 보라. 모두가 웃는다. 햇살 한 줌을 깨물고 하얗게 웃는다. 꽃잎을 간질이는 잔바람에 설레어 웃는다. 나비를 불러들이기 위한 교태이자 최음제이자 쇼에 다름 아닌 향기를 흩날리며 온몸 비비 꼬아 웃는다. 꽃들은 이렇게 웃음 천국을 연출한다.

그러니 꽃을 바라보는 사람도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구미에 맞는 꽃 앞에선 한 번쯤 히죽 웃는다. 꽃들이 무더기로 핀 꽃밭에선 다들 노골적으로 웃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꽃과 사람이 함께 웃다니! 이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경이다. 계산이 없는 순수한 웃음을 매개로 꽃과 사람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가히 찬탄할 만한 장면이다. 이는 일상에선 보기 힘든 것이다. 삶은 꽃이 아니라 진흙탕에 가깝다. 따라서 순수한 웃음을 날릴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건강이든 돈이든 가진 것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외려 움켜쥔 게 많을수록 번뇌가 들끓을 수 있다. 그래 흔히 ‘쉼’이 있는 삶을 추구한다. 가급적 단순하게, 가볍게, 웬만한 건 다 내려놓고 간소하게 살자 한다. 그래야 풀잎에 맺히는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어라! 정원의 풀밭 양지에서 작은 꽃 하나가 배시시 웃는다. 보랏빛 제비꽃이다. 화려한 꽃들에 비하면 이 꽃의 존재감은 허깨비에 가깝다.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에 밟히기도 한다. 카스트로 치자면 수드라급이다. 그러나 앙증맞고 깜찍해 어여쁜 꽃이다. 일단 눈이 가면 다시 보게 되는 ‘귀요미’다. 자태보다 옹골찬 건 제비꽃의 살림 경영법이다. 가진 것 없이 살겠다는 양 한사코 자제하는 게 아닌가. 이 땅꼬마 식물은 애초 한 줌도 안 되는 땅에 뿌리를 내린다. 낭비 없이 흙을 소비한다. 적은 양의 물과 햇볕만 쓰겠다는 듯 손가락 길이로 자라고 나면 더 이상 키를 키우지 않는다. 그러고서도 꽃을 잘만 피운다. 아무런 결함이 없는 완전체로 성장한다. 여기에 무슨 속임수가 있으랴.

제비꽃을 비롯해 모든 자잘한 풀꽃들에 대해 사람들은 일쑤 오해한다. 시시한 존재로, 작고 초라하고 외로운 꽃으로 친다. 간신히 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헛꽃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풀꽃들은 우리가 선망하는 ‘간소한 삶’에 이미 달관한 존재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거침없이 살다 남긴 것 없이 깨끗하게 떠나는 꽃이다. 이보다 나은 생이 다시 있을쏘냐. 정원의 명품은 어쩌면 제비꽃이다.

#여행 #시니어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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