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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에로틱한 전원생활

기사입력 2025-05-30 09:18

[전원일기]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이웃 사이의 매력

(어도비 스톡)
(어도비 스톡)


TV를 켜니 미친 산불이 휩쓸고 간 자리, 망연자실 황망하게 앉아 있는 농부에게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언가요?”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어라도 하려면 농기계 지원이 필수”라던 농부의 눈빛에 간절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 나온다.

농사를 지으려면 호미·낫·삽·쟁기·쇠스랑 같은 다채로운 농기구부터 분무기·관리기·예초기·트럭·트랙터까지 다양한 농기계가 필수 중 필수다. 지금도 초보 딱지를 떼지 못했지만 진짜 초보 농사꾼 시절의 일이 생생하다. 걸핏하면 호미나 낫을 밭에서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위쪽 밭에 두고 온 전지가위나 작은 톱이 아래쪽 밭에 있으려니 했던 일 또한 다반사였다. 풀을 뽑거나 가지치기하다 돌아서면 손에 들고 있던 호미나 낫이 사라져버리고, 전지가위와 톱은 발이 달렸나 온데간데없어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찾다 포기하곤 했다. 농부가 밭에서 농기구를 잃어버리는 건 조금 과장하면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잃어버리는 격인데 말이다.


(어도비 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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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사이

농기구도 우리네 살림살이처럼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쓰는 것, 가끔 필요한 것, 1년에 어쩌다 한 번 쓰는 것 골고루 있다. 초보 농사꾼이 종류별로 알뜰살뜰 빠지지 않고 제대로 갖추는 건 어차피 꿈도 못 꿀 일이기에, 걸핏하면 마을 어귀의 이장님 댁으로 이것저것 빌리러 가곤 했다. 대형 멍키스패너도 빌리러 가고, 물탱크에 연결한 모터에 부착된 뚜껑을 열거나 잠그는 데 필요한 도구도 빌리러 가고, 10단 높이의 사다리도 빌리러 가곤 했는데, 처음 몇 번은 흔쾌히 빌려주더니만 참다못한 이장님이 한말씀 하셨다 “원래 농촌에선 마누라는 빌려줘도 농기구나 농기계는 절대 안 빌려주는 법”이라고.

농촌 일이라는 건 때를 놓치면 “말짱 헛일인데 농기계 빌려주었다가 정작 본인이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여간 낭패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행여 빌려준 농기계가 고장이라도 나면 “피차 숟가락 젓가락 몇 개인지꺼정 아는 사이인데” 그만한 일에 얼굴 붉힐 수도 없고, 이래저래 빌려주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는 이야기였다. 농기계 안 빌려주려는 이유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왜 하필 마누라는 빌려줄 수 있다고 눙치는 건지….

그 이장님, 예순 넘은 나이에 마누라 몰래 바람피우다 들통이 났다. 상대는 서울서 직거래 장터 열릴 때 옆에서 도와주던 여자라는데, 그만 막내딸에게 딴살림 차린 현장을 들키고 말았단다. 이장님 마누라는 그 길로 가출하고. 실은 이장님 사연도 만만치 않아 당신도 어머니 두 분을 모셔야 했던 처지였다. 이장님 아버님이 본부인에게서 자식을 못 봐 후처를 들였는데, 거기서 나온 장남이 이장님이었단다.

이장님 댁 사연을 손금 보듯 훤히 아는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훈수를 두었다. “어여 마누라한테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 조강지처는 버리는 거 아녀” 하고 마누라 편드는 쪽이, “이 동네 소싯적에 바람 안 피운 놈 있으면 나와보라구 혀. 그만한 일에 집을 나가다니 밴댕이 소갈머리구먼” 하며 남편 편드는 쪽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이장님이 농협에서 지원하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장암을 발견했다. 덕분에 집 나갔던 마누라가 남편 곁으로 돌아오면서 해피엔딩(?)을 맞았다.


▲블루베리 꽃눈.(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블루베리 꽃눈.(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농사 훈수

요즘의 논농사는 장비 98%, 사람 2%라는 말처럼 모내기부터 마지막 정미까지 완전히 기계화되어 최고로 편해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면 밭농사는 작은 규모의 텃밭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고, 주로 70대 할머니들 담당인지라 기계화는 요원하기만 한 실정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산수유·개나리·매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마누라보다 아낀다는 이장님 트랙터가 분주해진다. 이집 저집 홀로 농사짓는 할머니들을 위해 트랙터로 로터리(밭갈이) 치는 재능기부를 하기 때문이다.

밭농사를 지으려면 일단 땅을 고른 후 골 타기를 하고 두둑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심을 작물에 따라 골 사이 간격을 얼마나 넓게 해야 할지, 두둑을 얼마만 한 크기로 할지가 달라진다. 서울 촌사람이 줄자 들고 다니며 높이 몇 센티미터, 폭 몇 센티미터 재고 다닐라치면 “뭐 땜시 일을 그렇코럼 한댜. 일머리를 모르는구먼”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올해는 고구마 심으려고 하는데 골을 얼마만 하게 타야 하나요?” 여쭈어보면 “청년들 등판맨키로 편편하게 땅을 고르고, 두둑은 아줌마 엉덩짝만 하게 펑퍼짐하게 만들라”고 한다. 고추나 상추를 심으려면 “아가씨 젖무덤만 하게” 하라고 훈수를 둔다.

듣기에 따라선 거시기하기도 하지만, 은근히 에로틱한 표현 덕분에 한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러고 보면 평생 농부들은 타고난 선생님인 것 같다. 농사 첫해에 복숭아 농장 30년 경력의 동네 어르신이 “어쩌다 농사가 잘 되면 3년을 고생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면 3년이 편안하구먼” 툭 한마디 던지고 가셨다. 농사를 왜 망쳤을까 두루두루 이유를 찾다 보면 배수는 잘 되고 있는지 챙겨보고, 거름은 제때 주었는지 따져보고, 잡초 관리도 부지런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연한 행운보다는 꾸준한 노력이 더 값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주옥같은 말씀을 듣는 순간, 교수로 지낸 직업병(?) 탓인지 에로틱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기야 폭 몇 센티, 높이 몇 센티씩 골을 타라고 했으면 금방 듣고도 금세 잊어버렸을 텐데, 아줌마 엉덩짝이나 아가씨 젖무덤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검붉은색이 매력적인 명자꽃을 가리키며 “얘는 순자 동생 명자여” 알려주니 몰랐던 꽃 이름도 귀에 쏙쏙 들어오고, 옹기종기 피어난 노란색 수선화를 보면 “수선스러워 수선화라네” 하니 밭둑을 지날 때면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밭에 심어놓은 채소가 시들시들 말라가거나 열매가 쭈글쭈글 비틀어지면 “말 못 하는 것도 서러울 텐데, 혼자만 먹지 말고 비아그라(영양제) 듬뿍 치라고” 거들기도 한다. “마누라 위해 비아그라 먹는 놈 한 놈도 못 봤다”는 후렴까지 덧붙이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온 건강한 에로티시즘 한 자락을 엿볼 때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앞페이지의 작은 꽃눈이 4월 말이면 탐스러운 꽃으로 피어난다.(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앞페이지의 작은 꽃눈이 4월 말이면 탐스러운 꽃으로 피어난다.(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생의 감각 깨우는 건강한 에로티시즘

에로틱한 유머 감각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가리지 않는다. 학교생활 재미가 쉬는 시간에 있듯 농사일 재미는 새참 먹으며 쉴 때가 최고다. 열심히 땀 흘리고 난 뒤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이 되면,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이어진다. 흘러간 옛 노래가 메들리로 이어지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도 구성지게 뽑아 제치는데, 노랫말이 은근히 야한 민요도 빠지지 않는다. 가만히 들어보니 “저 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잘 파는데 이 생의 우리 서방은 있는 구멍도 못 찾누나. 에헤야~” 이에 질세라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졌구나 흥” 하고 받으니 “동상(생)~ 자네 천안 삼거리에 축 늘어진 게 뭔지 알어?” 박장대소한다. 이제 힘 빠지고 끈 떨어진 남편 처량하고 불쌍해서 함께 살아준다 하니, “언니는 그류? 난 지금도 남편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린다니께” 하며 또 눈물 나도록 웃는다.


▲엉덩짝만 한 두툼한 두둑을 비닐로 멀칭했다.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엉덩짝만 한 두툼한 두둑을 비닐로 멀칭했다.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우리네 몸이 다시 돌아갈 흙살 만지며

쉬는 중에도 연신 발아래 풀을 뽑던 아주머님들, “며느리밑씻개가 벌써 올라오네. 초장에 뽑아부러야 혀” 손놀림이 빨라진다. 이름도 얄궂은 잡초 ‘며느리밑씻개’는 논둑이든 밭 언저리든 장소 불문하고 기막히게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얄궂은 이름의 이 풀은 소나무 묘목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감아 고사(枯死)시키는 저력을 갖고 있다. 둔덕을 덮어버린 며느리밑씻개를 비 온 뒤 거둘라치면 영락없이 손등과 팔 곳곳에 생채기가 난다. 원뿌리 말고도 사방팔방으로 줄기를 뻗어가며 촘촘하게 뿌리를 내리는 데다, 줄기 겉면에 끈적끈적하면서도 날카로운 털이 송송 나 있어 맨손으로 뽑다가는 털에 긁혀 상처를 내기 일쑤다. 시어머니 눈에 며느리가 얼마나 밉살스러웠으면, 줄기만 살짝 스쳐도 생채기를 내는 풀잎으로 밑씻개를 했으면 좋겠다는 엽기적인 생각을 했으랴 싶어 마음이 짠하다.

올해 팔순을 지나는 이웃 어른들께 농사의 재미가 무언지 여쭌 적이 있다. “땅이든 흙이든 거짓말을 안 혀. 뭐든 심어서 정성껏 가꿔주면 보답하지” 하신다. 척박한 땅도 있고 거친 흙도 있지만, 거름기 적당히 밴 비옥한 땅의 흙은 포슬포슬 보들보들 몽글몽글한 것이 촉감이 기가 막힌다. 그 옛날 보드라운 엄마 뱃살 같기도 하고, 보기만 해도 배부른 손주들 앙증맞은 귓불 같기도 하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라 그런가, 흙을 만지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면서 마음도 덩달아 단순해진다. 우리네 삶 속에 물질문명의 혜택이 그득하게 찰수록 자연 속에서 선물로 받는 치유의 힘은 점차 커가는 느낌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블루베리 꽃눈이 탱글탱글 맺히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울 기세다. 블루베리는 가지치기와 함께 꽃눈을 따줘야 한다.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블루베리는 대체로 꽃눈이 다닥다닥 달라는 편이라 서너 개만 남기고 솎아주어야 한다. 꽃눈 하나마다 열 송이 이상 꽃이 피고 벌님이 다녀가고 나면 송이마다 열매가 맺힌다.

게으른 농부가 소출이 많다고들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 부지런한 농부일수록 일찍일찍 꽃눈을 따주게 마련인데,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 꽃눈이 새까맣게 얼어 죽어 소출이 줄기 때문이다. 반면 게으른 농부는 냉해를 피하는 대신 그 많은 꽃눈이 모두 꽃송이가 되어 작고 볼품없는 열매를 가득 수확한다. 마트 진열대에 놓인 자잘한 블루베리를 보면 게으른 농부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이름조차 생소한지 블루베리 발음을 엉뚱하게 하는 동네 아주머님, 지나가며 한말씀 하신다. “탱글탱글한 꽃눈이 우리 손녀 젖꼭지만 허네. 이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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