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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전통을 꿈꾸며… “근대를 품은 극장, 세계를 향한 춤”

기사입력 2024-12-17 08:34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의 전통과 현대 이야기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노랗고 빨간 단풍이 고즈넉한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길, 정동. 이곳 근대의 역사를 간직한 국립정동극장에서 정성숙 대표는 전통과 현대를 엮어 미래로 보내고 있다.

“유치원 갈래, 무용학원 갈래?” 정성숙 대표가 일곱 살 되던 해 부모님이 물었다. 정 대표는 망설임 없이 무용학원을 선택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간장이나 두부 팔러 온 장수들이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그럴 때면 명절에 입는 때때옷(알록달록한 천을 이어 붙여 곱게 지은 어린아이 옷)을 달래서 입고 장수를 쫓아다니며 덩실덩실 춤을 췄어요.”

전통예술을 보는 눈

친구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무용학원에서 무용을 배운 정성숙 대표는 이후 사립 예술중학교인 예원학교에 입학, 1회 졸업생이 됐다. 이어 서울예술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정 대표는 쇼트커트에 이화양장점에서 맞춘 옷과 구두를 신고 다녔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예능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던 때였기에 어쩌면 영재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무용 대가라 불리는 최현 선생과 서울시립무용단 초대 단장 문일지 선생을 비롯해 한국 창작춤을 대표하는 안무가 김매자, 한국 발레 선구자 임성남, 교육자이자발레무용가 김학자 선생 등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스승님들의 작품을 보고, 1961년 창단된 한국 최초의 뮤지컬 극단 예그린악단 작품을 보기도 하면서 전통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러다 어떤 갈증을 느낀 정 대표는 이론과 실기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화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용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무형문화재론, 문화재관리론 등을 강의했다.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이뿐만 아니다. 정성숙 대표는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 불리는 우봉 이매방 선생 밑에서 국가무형유산인 승무, 살풀이춤을 이수했다. 이렇게 이론과 실기를 충실히 쌓은 정 대표는 문화체육관광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 강남문화재단 전통예술단 예술감독, 문화재청 서울특별시·강원도·충청남도·충청북도의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 우리춤협회 부이사장을 거치며 전통예술의 기반을 닦았다.

“새로운 창작을 하더라도 실기와 이론이 병행되면 더 좋은 아이디어로 더 탄탄한 작품을 올곧게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되더라고요. 제 이름이 정성 성(誠), 맑을 숙(淑)인데요. 이름대로 주어진 것에 항상 꿈을 가지고 반듯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그때 그 시절 인연에 의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온 것 같아요. 지금은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감동받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에 소명을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정동극장의 정체성을 묻다

2022년 11월 국립정동극장에 취임한 정성숙 대표는 정동극장만의 색깔을 살리고 전통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데 집중했다. 국립정동극장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과 근현대 예술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1995년 개관한 곳이다. 정 대표는 정관에 명시된 극장의 설립 목적인 ‘공연예술진흥사업 및 전통문화의 보존·계승 발전에 기여’를 언급하며 “미래를 향한 쉼 없는 도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다양한 장르와 전통예술 분야의 조화 및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연극, 무용, 전통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루더라도 정동극장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통의 대중화와 활성화를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했죠. 정동극장 주변을 둘러보니 점심시간이 되면 많은 분이 커피 한잔씩 들고 걸으시더라고요. 여기에 착안해 정동별곡, 정동다음, 정동다향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3분 만에 티켓이 모두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국악동화 공연 정동별곡, 정동극장 내 2층 정동마루에서 차를 마시며 명상도 하고 국악인의 소리를 코앞에서 감상하는 테라피 콘서트 정동다음, 중구청에서 진행하는 정동야행과 함께한 차·커피·음악이 어우러진 야외 공연 정동다향까지. 관객이 더 쉽게 전통을 즐길 수 있도록 전통예술의 문턱을 낮췄다.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사진=오병돈 프리랜서)

또한 정동극장 세실을 통해 2차 제작극장으로서 창작 생태계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세실극장은 1976년 개관, 1970~80년대 소극장 연극의 중심이었던 역사적 공간이다. 서울시는 2013년 이곳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운영 주체가 수차례 바뀌면서 폐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를 정동극장이 2022년 7월부터 맡아 국립정동극장 세실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면서 ‘창작 핵심 기지’로 입지를 다졌다.

먼저 한국무용 대가 김매자•국수호•배정혜 명인이 무대를 꾸민 ‘한여름 밤의 춤’, 근현대 춤 100년의 여정을 보여준 ‘세실풍류’ 등으로 전통예술인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또한 창작 공모전 ‘창작ing’을 통해 창작자들의 무대 기획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발굴된 우수 작품은 지역 공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에 2023년에는 292명의 창작진이 ‘창작ing’에 참여했으며, 10개 작품의 공연이 103회 무대에 올랐다. 2022년 6234명이었던 관람객은 2023년 1만 4942명으로 크게 늘었다. 또한 정동극장 개관 이래 최대 매출을 달성했으며, 지난해만 29편 427회의 최다 공연 실적도 기록했다. 정 대표는 “다양한 창작자들이 무대에 오르고, 많은 관객이 찾는 극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다”면서 “짧은 기간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부분은 큰 행운”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K-전통을 세계로

한편으로 근대문화가 시작된 정동 지역의 색을 살린 공연들도 기획했다. 정동길에는 옛 러시아공사관, 정동제일교회, 신아일보 별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근대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언덕 위에 서양인 부부가 짓고 인도 이름을 붙인 집 ‘딜쿠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을 시작으로, 소록도를 통해 사회의 편견·차별·사랑을 다룬 뮤지컬 ‘섬:1933~2019’, 1910~60년대의 다양한 음악과 유행가를 바탕으로 춤을 선보인 ‘모던 정동’, 근현대 신여성을 통해 자유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뮤지컬 ‘아이참’ 등에는 근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근대문화가 최초로 거쳐간 정동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그 안에서 국립정동극장의 지리적·위치적 정체성을 고민하고, 우리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품이 힘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별화된 강점을 살려 역사가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이어가려 합니다.”

나아가 전 세계로 한국 전통예술이 알려지길 바라며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의 공연 브랜드 ‘K-컬처시리즈’를 준비했다. 정동극장 예술단은 사물놀이 등 다채로운 전통예술이 어우러진 연희 단체를 지향한다. 이런 예술단의 정체성을 살려 첫 번째 K-컬처시리즈로 ‘소춘대유희’를 선보였다. 지난 11월 쇼케이스를 열었고, 2025년 1~2월 정기 공연을 열 계획이다. 이후에는 ‘심청’이 준비되어 있다.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이 전통 창작 공연 브랜드 ‘K컬처시리즈’ 첫 작품으로 선보인 ‘소춘대유희’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이 전통 창작 공연 브랜드 ‘K컬처시리즈’ 첫 작품으로 선보인 ‘소춘대유희’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또한 외국인 관람객을 위한 자막 서비스, 언어별 공연 소개 자료, 예매 편의 시스템 등을 마련하고 있으며, 해외 공연도 추진 중이다. 개관 30주년인 2025년에는 이렇게 쌓아 올린 정동극장의 정체성을 물씬 담은 새로운 작품들도 공개될 예정이다.

“요즘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해요. 과거에 우리 음식은 손이 많이 가서 세계화가 어려울 거라는 시선이 많았는데, 지금은 미국 마트에서 냉동 김밥이 엄청 인기잖아요? 또 BTS가 북과 부채를 활용한 안무를 선보이면서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불렀을 때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아리랑’을 따라 불렀고요. 앞으로 우리 전통이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때가 올 거라 생각해요. K-팝, K-드라마, K-푸드 다음은 K-전통 아닐까요?”

정성숙 대표는 지난해 봄 열었던 미디어아트 음악 콘서트 ‘비밀의 정원’ 공연에서 “세시봉 윤형주, 김세환 가수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르던 중장년 관객들이 기억에 남는다”며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차도 한잔 하시고 좋은 공연도 보시면서 힐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많은 분이 무용이나 판소리가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 국극을 다룬 드라마 ‘정년이’가 인기를 끌고, 무용수들이 나오는 ‘스테이지 파이터’라는 프로그램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잖아요. 이렇게 생활 속으로 전통이점차 녹아들 수 있도록, 저도 제 자리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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