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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배운다

입력 2026-07-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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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중장년 진짜 공부’] “무심함 속에 감춰진 깊은 위로”

열아홉 살 무렵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공부는 핑계였고, 사실은 도망이었다. 고3 여름방학 전주 ‘남고사’에서 한 달을 보냈다. 남고사 옆에는 엄마 산소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산은 내 사정을 묻지 않았다. 불쌍하게 여기지도,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아침마다 안개가 내려앉고, 낮에는 새가 울고, 밤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무심함 앞에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사람의 눈길이 없는 곳에서 비로소 나는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미지=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산에서 보낸 한 달 동안 공부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한 달이 내 생애 가장 깊은 공부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자연은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무에게 배우는 느림과 공존의 지혜

남고사 주변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 나무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무는 단단히 뿌리내리고 줄곧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러면서도 위로 오르는 걸 포기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간다. 그러기 위해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나무는 나이테를 만들며 계절에 맞게 천천히 자란다. 그뿐 아니라 나무는 모든 걸 내려놓는다. 여름에는 그늘을 내어주고, 가을이 되면 잎을 버린다. 나무는 서두르지 않지만 결국 숲을 이뤄 더불어 살아간다. 나무는 경쟁과 독점보다는 공존과 연대가 살아남기에 더 유리하다는 걸 가르쳐준다.

나이 들수록 우리는 무언가를 더 움켜쥐려 애쓴다. 하지만 나무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잎을 떨구고 비우는 법을 안다. 스스로를 비워내야 더 넓은 숲을 향해 뻗어갈 수 있음을, 서로의 그늘을 공유하며 함께 숲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생존임을 나무는 말없이 증명한다.


산, 하산을 준비하는 어른의 겸손

나이 예순이 넘으면 선생이 달라진다. 젊을 때는 사람한테서 배웠다. 스승을 찾아다니고, 책 속에서 배웠다. 나보다 잘난 사람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조금씩 버거워졌다. 사람의 말에는 다른 의도가 있고, 행동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무렵부터 나는 자연에 눈을 돌렸다. 자연은 의도가 없고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랑하거나 비교하지도 않으며, 그냥 거기 있다. 산은 그냥 솟아 있고, 바다는 그냥 넘실대고, 강은 그냥 흐른다. 그럼에도 그 무심한 것들로부터 삶의 가장 깊은 통찰을 얻는다.

인류의 스승은 늘 자연이었다. 노자는 물에서 도(道)를 보았고, 이황은 산을 닮으려 했고, 정약용은 유배지 강가에서 학문을 벼렸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있었고, 인간은 늘 자연으로부터 삶의 이치를 배웠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도 결국 인간을 끝까지 가르치는 것은 자연일지도 모른다.

젊을 때 산은 정복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올랐던 설악산 대청봉, 대학 1학년 때 깃발을 꽂았던 지리산 천왕봉, 신혼여행 때 아내와 함께 올랐던 한라산 백록담. 그때는 더 빠르게, 더 높이, 남보다 먼저가 산을 오르는 이유였다.

중년에 마주하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확인하고 수용하는 장소다. 삼십 대에 거뜬히 넘었던 고개가 이제는 숨을 잡아당긴다. 걸음마다 다리가 묵직하다. 잠시 멈춰 서 숨을 고르는 동안 산은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늦었다고 핀잔주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 침묵이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주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산은 조급함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친다. 빨리 간다고 정상이 앞당겨지지 않는다. 자기 걸음으로, 자기 호흡으로, 한 발씩. 그것이 전부다.

두 번째는 정상에서 배운다. 올라오는 길에는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꼭대기에서는 마을이 보이고 강이 보이고 저 멀리 다른 산이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힘겹게 오른 산도 더 큰 산 앞에서는 낮은 언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높은 곳에 올라서야 비로소 자신의 작음을 보고 겸손을 배운다.

세 번째 가르침은 내려올 때다. 정상을 찍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고, 다리는 이미 지쳐 있다. 산은 거기서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 가르친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어렵다. 예순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보면 하산의 시간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무사히, 품위 있게 내려오는 것. 산이 그것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바다, 흘려보내고 받아들이는 포용

아내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 가족은 여행 목적지가 산과 바다가 절반씩이다. 나는 바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하염없이 작아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 아무리 세찬 강물과 폭풍도 바다는 다 받아낸다. 탁한 것, 맑은 것, 차가운 것, 뜨거운 것 모두 다 품는다. 바다가 온갖 강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낮아졌기 때문에 넓어질 수 있다.

예순이 넘으면 포용의 문제와 정면으로 만난다. 젊을 때는 마음에 안 들면 바꾸고 고치거나 피해 갔다. 그런데 이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 같지 않은 몸, 품을 떠난 자식, 흘러가 버린 시간 등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예순 이후 삶의 질을 결정한다.

바다는 파도를 붙들지 않는다. 바다가 늘 수평선을 유지하는 것은 쉬지 않고 받아들이고 쉬지 않고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들어온 만큼 내보낸다. 사람은 흘려보낼 줄 알아야 비로소 가벼워진다. 지나간 세월, 떠난 자식, 이미 가버린 사람을 끝끝내 붙잡고 놓지 못하는 미련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이처럼 마음의 항구에 낡은 기억을 쌓아두지 않고 파도처럼 밖으로 밀어낼 때 우리의 내면은 맑아진다. 포용이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내게 들어온 것들을 적절히 흐르게 해 순환시키는 지혜다. 바다의 수평선은 어제의 상처를 씻어낸 자리에 오늘이라는 희망을 채워 넣는 비움의 미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아내는 바닷가에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긴다. 처음엔 심심하고 잡생각이 몰려오지만, 어느덧 파도 소리만 남고 그 순간 머릿속 엉킨 매듭이 풀린다고 한다.


(이미지=AI 생성)
(이미지=AI 생성)


강, 멈추지 않고 흐르는 삶의 역동성

강은 한 번도 뒤로 흐르지 않는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나는 그 긴 여정에서 강은 한 번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돼 떨어지고, 넓은 벌판을 만나면 느릿느릿 퍼져가다가 결국은 바다에 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향만은 잃지 않는다.

공자가 강가에서 말했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흔히 시간의 무상함을 탄식한 말로 읽지만, 나는 나이 들수록 감탄에 더 가깝게 들린다. 멈추지 않는 것을 향한 감탄. 어떤 역경에도 흐름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한 존경이다. 강이 가르치는 첫 번째는 계속 가는 것이다.

예순이 넘으면 많은 것이 멈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장이 멈추고 가능성이 닫힌 기분이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다 지나갔다는 패배감이 문득문득 찾아온다. 그런데 강은 그렇지 않다. 좁은 골짜기에서 더 빠르게 흐르고, 넓은 평야에서 더 풍요롭게 흐른다. 폭이 달라지고 깊이가 달라질 뿐 멈추지는 않는다.

삶의 전성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일지 모른다. 강물은 찰나마다 새롭다. 어른의 공부는 과거의 영광이나 후회라는 웅덩이에 고여 썩지 않는 것이다. 어제의 나를 흘려보내고 오늘의 나로 새롭게 흐르는 것. 그것이 강이 가르치는 공부다.

두 번째는 유연함이다. 강은 고집하지 않는다. 바위 앞에서 반드시 직선으로 가겠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돌아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돌아가면서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더 비옥한 땅을 적시고, 더 많은 생명에게 물을 나눠준다. 어른의 지혜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물러서고 돌아가는 때를 아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흐른 자리에 무엇을 남기느냐다. 강이 지나는 곳에 문명이 생긴다. 나일강의 이집트, 황하의 중국, 한강의 서울. 강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지나는 곳마다 사람이 모이고,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피어난다. 내 삶은 지금 어디를 흐르고 있는가. 지나는 자리마다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연습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자연은 가장 공평한 스승이다. 학벌도, 나이도, 돈도 따지지 않는다. 산은 누구에게나 높고, 바다는 누구에게나 넓고, 강은 누구에게나 흐른다. 그 앞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이 작고, 똑같이 배울 것이 많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우리는 흙에서 와 잠시 이 땅을 빌려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자연을 공부한다는 것은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거대한 질서 속에 겸허히 나를 맡기는 연습이다.

자연은 늘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여기서 다시 숨을 고르라고 말한다. 산은 천천히 가도 된다고, 바다는 놓아주라고, 강은 그래도 흘러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쓰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한다.

어쩌면 어른의 공부란 새로운 것을 더 배우는 일이 아니라, 자연이 오래전부터 해오던 말을 뒤늦게 알아듣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스승 앞에 앉아, 나라는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어갈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 이것이 바로 우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른의 공부를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자연에서 배우려면

첫째, 멈춰야 한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코스를 따라, 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는 압박으로 걷는다. 이는 자연을 통과하는 것이지 배우는 게 아니다. 자연은 서두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둘째, 비워야 한다. 자연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올린다. 자연 속에 있지만 머리는 도시에 있다. 그러면 자연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없다. 머릿속의 걱정을, 해야 할 일을,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을 잠시 내려놓고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자연은 속삭인다.

셋째, 오감을 열어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가 오기 전 흙이 내뿜는 냄새,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소리, 산꼭대기에서 온몸을 파고드는 바람. 자연을 오감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면 보이게 된다고 했다. 자연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세밀한 결을 보여준다.

넷째, 몸으로 겪어야 한다. 바다에 관한 책을 백 권 읽어도, 실제로 파도에 몸을 맡겨본 경험 하나를 따라갈 수 없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몸으로 자연을 겪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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