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투어] 폴란드 크라쿠프
폴란드 남부에 자리한 크라쿠프는 옛 폴란드의 수도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때 완전 파괴되어 온 도시를 새로 복원했지만 크라쿠프는 옛 유적지가 고스란히 남은 고도다. 구시가지는 세계유산 등재가 시작된 첫해(1978)에 지정되었다. 매력이 폴폴 넘치는 그곳엔 동양적인 것들도 남아 있다. 13세기 타타르족에게 굴복당했던 이 도시에는 만두를 닮은 ‘피에로기’가 전통음식으로 남았다.
글·사진 이신화(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피아스트 왕조와 야기에워 왕조가 남긴 위대한 업적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로 가는 중요한 목적은 아우슈비츠를 보기 위함이다. 침대열차를 타고 승무원에게 오비시엥침 역에서 깨워 달라 부탁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도 기적소리도 못 느낀 채 깊은 잠에 빠진 그날. 친절한 승무원이 일부러 깨우러 왔지만 잠에 취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크라쿠프 역에 내린다. 첫새벽이라 검표원도 없다. 부산하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사라진 역사에 우두커니 한참 서 있다가 빠져나온다. 요새 역할로 성을 에둘러 심은 숲 정원을 넘어서자 바로 구시가지다.
도시는 기대 이상으로 고풍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라쿠프는 그 역사가 깊다. 폴란드의 첫 번째 피아스트 왕조(960년경~1370년)가 410년간 통치했다. 피아스트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3세는 폴란드의 역대 왕들 중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피아스트 왕조 이후 야기에워 왕조(1386∼1572)가 186년간 통치한다. 야기에워 왕조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작이었던 요가일라가 야드비가 여왕과 정략결혼(1386)하면서부터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 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가 출현한다. 역 앞에서 만난 야기에워 기마상(1910, 그룬발트 전쟁 500주년 기념)이 힘차 보이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1410년,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전투는 대단한 일이었다.
500여 년의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 유적으로 남아
도심을 에두른 방어벽인 바비칸(누문, 망루, 1498년경)이 남아 눈길을 끈다. 바비칸은 성 플로리안의 성문을 통과하고 도시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검문소 역할을 했다. 성문을 통과하면 겨우 마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돌로 포장된 좁은 플로리안스카 길이 펼쳐진다. 올드 타운의 메인 광장은 리네크 글로브니(마켓 광장)다. 근 500년 넘게 크라쿠프 상징의 장소다.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활기가 넘치는 광장엔 골목을 누빌 관광마차가 대기해 있고 카페, 레스토랑은 물론 난전도 펼쳐진다. 광장에는 14세기에 지어졌다가 1555년 재건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 길드관(sukiennice)이 있고 그 앞에는 19세기 폴란드의 위대한 작가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에 비교될 정도다.
또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두 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 성 마리 성당이 있다. 첨탑을 만든 형제의 불행한 전설이 흐르고 종탑에서는 매시간 ‘헤이날(Hejnal)’이라는 트럼펫 멜로디가 연주된다. 1241년, 몽골군(타타르족)의 침략을 알리던 노 나팔수를 기리기 위한 연주다. 이 성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년간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성 마리 성당 뒤에는 성 바바라 교회가 있고 중앙 광장 남쪽 끝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작고 오래된 성 아달베르트가 남아 있다. 유럽을 종단하던 중세 상인들의 예배처는 원래 10세기에 지어졌지만, 바로크양식의 지금 모습은 17세기에 재건축된 것. 이 작은 성당은 몽골 침략 때 시민들의 피난처였다.
긴 역사의 명문, 야기엘론스키대학교
크라쿠프 거리가 젊음이 넘치는 것은 야기엘론스키대학교 덕분일 것이다. 1364년, 카지미에시 대왕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됐다. 유럽 최초로 지어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를 본떴다. 그가 죽은 후 답보 상태에 있던 대학교는 야기웨어 왕조의 야드비가 여왕이 산후풍으로 죽으면서 남긴 보석과 유언을 받들어 재건(1400)했다. 1406년에 예술학부가 창설되어 많은 음악가가 이곳에서 수학했다. 15~16세기에 크게 발전했고 1817년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개명했다.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때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1918년에 폴란드가 해방된 후 눈부시게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교 출신이다. 16세기에 파우스트 박사도 이 대학교에서 연구했다. 특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1996년 노벨상을 받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공감적이며 가슴을 폭 파고 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쉼보르스카 시 ‘여기’ 중).
‘북쪽의 로마’, 무수한 성당들과 바벨 궁전
메인 광장에서 곧추 직진해 카노니차 거리부터 바벨 성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교회들이 열 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는 비스와 강변까지 이어진다. 17세기, 이 도시에는 수도원과 오래된 성당(약 65개소)이 워낙 많아 과거 ‘북쪽의 로마’로 불렸다. 도시 남쪽, 비스와 강 상류의 석회암 언덕(해발 228m)에는 바벨 성이 우뚝 서 있다. 바벨은 폴란드 왕조의 가장 중요한 궁이었으며, 폴란드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자 기념물이다. 500여 년간 군주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가 열리던 곳. 특히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의 탑은 작고 소박하지만 예술미가 뛰어나다. 지그문트 종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봉직했던 성당이다. 그 외에도 유대인 지역인 게토가 남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비롯 많은 명화를 만들어낸 로만 폴란스키가 8세 때 탈출한 곳이다. 또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 전반은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지였던 크라코브스카 거리가 배경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의 배경이 된 골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