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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참 곱다

기사입력 2017-05-16 11:22

올해로 구순이 되는 노모를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남도 나들이를 다녀왔다. 잔치 대신 해외여행을 추천해 드리니 지난 추억이 있는 그곳을 돌아보고 싶으시단다. 우여곡절 끝에 일정을 맟춘 네 자녀들과 함께 변산-개심사-내소사-목포-신의동리-광주-담양을 4박 5일 동행했다. 모두가 귀한 기억을 하나씩 더 안고 온 흡족한 추억 여행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헌것 주면 싫어해요.”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 방문에 앞서 일가친척에게 보낸다며 온갖 것을 정리하신다. 한 달 전부터 방 한쪽에 놓인 가방에는 눈에 익은 낡은 옷가지에서부터 모자, 가방, 스카프, 냄비, 스테인 그릇, 전자제품, 갖가지 건강기구까지 한 살림이다. 나들이용으로 당신 카디건을 장만하면서 동서 블라우스, 시동생 티셔츠, 사촌조카 치마까지 거침없는 노모의 구매가 조금은 낯설었다. 바리바리 싸놓은 보따리가 한 짐이다. 급기야는 겉옷까지 주고 오셨지만 더 못 준 것이 아쉽다 하신다.

묵은 추억을 찾아가는 마음은 기존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기억 찾기 퍼즐놀이라고나 할까?’ 제각각의 추억을 지닌 관계로 감흥 역시 다르다. 기억의 파편들은 저마다 다른 프리즘으로 떠오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몇 편의 이야기로 아스라하게 남겨지나보다. 내 어린 추억은 이렇다. 할아버지 댁 입구를 지키던 우람한 구슬나무, 넓게만 보였던 앞마당, 높이 올려보았던 감나무, 소와 닭이 잠자던 외양간, 흙바닥의 낮은 부엌, 아궁이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무쇠 솥에서 나는 보리밥 냄새, 땔감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재미난 불 때기.

‘시골집이 있기는 하나?’

좁은 농로는 2차선 도로가 되어버렸고, 실 같던 흙길은 시멘트에 덮여 낯설었다. 그 길에 서서 마을 주민에게 옛집을 물으니 손끝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반색하며 맞이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서로 주름진 얼굴을 마주 보며 흐린 기억을 더듬으며 애써 끈을 찾는다. 선친께 술을 부으며 절을 올리고 나니 아직 남은 지인 몇 분이 찾아오고, 묵고 묵은 긴 이야기는 밤까지 이어진다.

바다 위로 섬을 잇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7월 준공이라는 말에 모터 나룻배로 섬을 이동하니 그쪽 역시 공원 조성으로 중장비 소리가 시끌하다. 하루 네 번 다니는 마을버스를 눈 빠지게 기다리다 물으니, 기사 양반이 친척 결혼식으로 뭍에 갔다가 오후에나 온단다. 시골답다. 덕분에 맥없이 길가에 한 줄로 앉아 구순 노모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전래 동화처럼 듣는다. 그 이야기 속에 철쭉, 벚꽃,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할미꽃, 수국 등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봄꽃이 참 곱다.”

따스한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벚꽃 사이를 걸으며 노모가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네 인생도 꽃을 닮았다는 말에 완전 동의하며 살아 있는 人花, 사람꽃끼리 한 번 더 쳐다본다. 동행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엄마와 같이할 수 있는 봄이 몇 해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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