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학교가 끝나면 몇 명이 몰려 마포나루로 달려가 주위를 둘러보고 보는 이가 없으면 옷을 벗어 알몸으로 책가방과 함께 머리에 이고 얕은 모래톱 찾아 여의도까지 걸어가 놀던 생각이 난다. 밖은 땀이 줄줄 흘렀지만 한강물이 어찌나 추웠던지 덜덜 떨어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끔 그때 함께한 친구들과 술안주 삼는 걸 보면 몇 안 되는 강한 추억이다
나이 들수록 속도에 가속이 붙는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시작인가 했더니 어느새 반환점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 선조들이 말씀 하시던 중용이란 말이 이 나이 돼서야 실감나는 걸 보면 나는 느림보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정확히 중용적인 삶이 무엇인지도 어렴풋하다. 어디에 의지하지 않고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삶. 말로도 어려운데 그런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중용이란 어느 물체 사이의 중간이란 수학적 거리 개념이 아니라 개개인이 다를 수 있는 기준의 역동적 의미가 더 큰, 살아 있는 의미의 이성적 마음가짐이란 생각을 해 본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이 아닌 때로는 한 쪽에 더 밀어주고, 당겨주는.
검찰청사 안의 눈을 가리고, 한 손에 칼, 다른 한 손에 평형을 이루고 있는 저울을 잡고 있는 조형물을 봐도 평형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 같아 불가능한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반기 삶이 함께하는 삶이었다면, 하반기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홀로 가기 삶이, 자기 존재의 의미,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지, 남의 눈이 아닌 내가 생각해도 내 적성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남성들의 청개구리 유전자를 발휘해보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죽은 게 아니다란 말이 있다. 우리의 초점을 미래에 맞춰 상상하고 꿈꿔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꿈꾸지 않으면 꿈을 꿔도 개꿈일 뿐이다. 무엇을 해도 후회 없는 삶은 없다. 단지 후회를 어떻게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느냐 도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6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왠지 숙연한 분위기의 한국전쟁, 장마, 회색구름, 불쾌한 무더위란 말이 슬그머니 곁에 앉는다.
어디를 봐도 녹색의 우거진 신록.
피 천득 시 중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태양이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고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란 시구가 가슴에 들어온다.
며칠 전 집에 오는 길 눈도 안 좋은 내게 땅바닥에 기어 나 여기 있다 손 흔들던 싸라기만큼 작은 그 꽃. 그는 그만의 모양, 빛깔, 사연 그 자체로 존귀했다. 작디작은 존재도 이리 귀한데 6월은 맞는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날이 좋다. 집 앞 산보라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