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 세계화에 한평생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꿈”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