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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준의 스토리텔링] 트라우마 제거 작전

기사입력 2015-12-18 07:42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정면으로 맞서다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좋았을 때가 생각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안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들,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들….

무심결에 실수하거나 다분히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과거의 나와 머릿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또는 내게 그렇게 하는 다른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반성보다는 후회를 먼저 하는 것이, 그래서 곱씹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작심하기보다는 그저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 나라는 용렬한 인간의 한심한 습성이다.

저마다 삶의 무게는 다르다, 트라우마도 다르다

요즘 부쩍 늘어난 그런 현상을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설명했더니, 대뜸 용어 정리부터 해주었다. 트라우마(trauma)는 옛날 그리스말로 ‘상처’를 뜻하는 단어라고, 그러므로 내가 의도한 뜻으로 쓰려면 앞에 ‘정신적’이라는 말을 붙여야 좀 더 옳다고, 트라우마가 ‘심적 외상’이라는 뜻으로 곧장 쓰이는 분야는 정신의학과밖에 없다고. 누가 이과 출신 아니랄까봐 자못 까다롭다.

그러면서 큰 인심 쓰듯 걱정 말라고 했다. 후회와 미련은 누구나 갖고 살아간다면서 그 정도는 정신적 외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했다. 하긴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끔찍한 테러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고민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친구는 그러면서도 당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 견디지 못할 정도면 언제든 병원에 찾아오라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실은 거의 빠짐없이 과거 자신이 한 일이나 겪은 일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렇게 되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뇌의 변연계에 존재하는 편도와 해마라는 두 부분의 구실에 대해 안다면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아주 쉬워진다.

편도와 해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곳이다. 쉽게 말해 편도는 무의식, 해마는 의식과 연관된 반응과 기억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심리 상태는 편도 때문이다. 해마는 그 뒤 자라가 아니라 솥뚜껑이었다면서 놀란 가슴 진정시키는 몫을 떠맡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편도와 해마는 당시의 경험과 감정을 각각 나눠 저장한다.

문제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격렬한 경험을 하게 되면 편도와 해마가 제 할 일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이 급증하고 세로토닌은 급감하는, 나로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생화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편도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고 해마의 힘이 지나치게 약해진다.

전에 없이 활발해진 편도는 조그만 자극에 시도 때도 없이 그때 그 기억을 끄집어낸다. 세상에서 부지런한 바보처럼 해로운 것이 없다는데, 해마가 바로 그런 ‘부지런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마음의 병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난다.

이 어려운 이름의 정신질환은 창작물, 그 가운데에서도 영화, 그 가운데에서도 스릴러 장르에 애용된다.

영화 속 트라우마의 두 얼굴

어떤 영화의 악당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면 십중팔구 이 병을 앓고 있다. 영화에는 플래시백이란 편집 기법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과거 회상 장면’이다. 현재 장면과 구별되게 촬영되거나 알기 쉽게 흑백 또는 세피아 톤으로 처리되곤 한다. 악당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을 푹 쓰면서 천연색 영상이 세피아 톤으로 바뀐다면 ‘어릴 적 나쁜 기억이 등장하겠군’ 하면 된다.

악당만이 아니다.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 역시 부모가 흉탄에 죽음을 맞이한 끔찍한 기억과 어릴 때 우물에 갇힌 폐쇄 공포의 기억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밤낮으로 브루스 웨인과 박쥐 사나이라는 두 얼굴로 살아간다.

007 시리즈의 신작이 개봉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능글맞은 제임스 본드조차도 실은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전작 <007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킨케이드(앨버트 피니)는 부모가 죽을 때 어린 제임스가 밀실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왔을 때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지.”

꼬마가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니, 제임스 본드의 해마 역시도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진 게 틀림없다. 부모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처절한 경험과 폐쇄 공포라는 극단적 경험을 한꺼번에 치른 이후에.

▲영화 <배트맨 비긴즈> 중 배트맨이 된 브루스와 그의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
▲영화 <배트맨 비긴즈> 중 배트맨이 된 브루스와 그의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
스스로 진단하는 기준이 있다

얼마나 힘들어야 힘든 것일까? 바보 같은 해마가 얼마나 부지런해져야 ‘마음의 병’이라고 부를 수준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생활하기 힘들 정도면 전문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좀 젠체하는 의사라면 미국정신의학회의 에 실려 있는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기준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그곳에 실린 진단기준이라는 녀석을 써보기는 하겠는데, 과히 기대는 않는 게 좋겠다. 문장이 너무 까다로워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거기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리려면 이런 경험을 해야 한다. ‘실제적 죽음 또는 죽음의 위협에 대한 사건들 또는 심한 부상,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위협을 경험, 목격하거나 직접 직면한 적이 한 번 또는 여러 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강한 두려움, 무력감 또는 공포를 포함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

이 정신없는 진단기준은 심지어 자주 바뀌기까지 한다. 1980년에 처음 정해진 뒤로 벌써 다섯 번 이상 고쳐졌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서 기준에 대한 연구와 주장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란다.

과거의 극심한 경험 탓에 트라우마가 생겨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게 병적으로 좋다면 또 몰라도,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기준 따위는 그냥 잊도록 하자. 다행히 미국정신의학회도 자신들의 기준이 좀 심란한 줄은 알았는지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PTSD 자가 진단 기준’ 참조)

물론 이것은 테스트용일 뿐이다. 정확한 진단은 전문의에게 맡겨야 한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는 것

많은 의사들은 말한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현실이 힘들다면, 그 끔찍한 기억에 스스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고.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상처 난 마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했더니 적절하게 예를 들더군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꾸깃꾸깃 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 ‘지금 이 종이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한 번 구겨진 종이는 두 번 다시 예전처럼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짙건 옅건 구김이 남아 있지요. 트라우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 나아가 자신의 대처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일본 무사시노대학 심리임상센터의 고니시 세이코(小西聖子) 박사의 말이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고 과거에 용감히 맞부딪치면서 이겨나가는 것,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그냥 잊어”라고 종용하는 것은 술 마신 다음 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리 마셨어?”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술 마시는 사람은 다음 날 괴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알면서도 마시는 것이다.

PTSD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잊고 싶다. 다만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괴로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해상 블로그에 트라우마와 관련해 흥미로운 제안이 실려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나름대로의 답안이다.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더 부지런하고 솔직해지면서 착해지자는 말인데, 비단 정신질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충고는 아닌 것 같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로드쇼> <프리미어>, 남성교양지

<에스콰이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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