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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 집 짓기, 그 완성되지 않은 꿈

입력 2025-11-29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마을 뒷산에는 여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나무들이 널찍한 푸른 잎을 늘어뜨리기 시작하고, 미처 개화하지 못한 꽃망울들이 서둘러 일제히 만개해 떠나간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동쪽으로 한 마장가량 떨어진 작은 농촌 마을을 가로질러 물뱀처럼 휘감아 도는 개울물이 돌돌 흘러가는 게 보인다. 희뿌연 안개가 먼 산들 사이에 바닷물처럼 출렁이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파란 하늘을 치켜올리고 있어 마치 천막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아직 고르기 작업이 안 된 마당에는 잔돌들 틈에 드문드문 솟아난 바랭이, 쇠비름, 질경이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개망초, 뚱딴지, 엉겅퀴들이 눈에 띈다. 집 가장자리로는 무성히 자란 환삼덩굴도 보인다. 겨울이면 북풍을 막아줄 나지막한 야산이 집 뒤에 둘러 있고, 앞에는 개울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들 너머로 너른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낭만적인 풍경을 만든다. 뒤로 돌아보면, 제법 형태를 갖춘 이층 목조주택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서 있다. 방금 재단한 듯 싱싱하고 향긋한 굵은 나무 기둥들이 주춧돌 위에 곧바로 서서 대들보, 처마와 추녀 골재들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 마당에는 건축자재와 공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기 위한 덮개판들이 밑에서부터 용마루 쪽으로 붙기 시작한다. 목수들과 인부들의 쩡쩡 망치 두드리는 소리와 윙윙 드릴 돌아가는 소리가 고요한 숲을 깨워, ‘숲의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알과 새끼들을 날갯죽지와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긴장된 날들을 보냈을 날짐승들과 들짐승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집이 완공되면 이들과도 곧 친해질 수 있으리라.

집 짓기는 여기까지밖에 진행되지 않고 멈춰 있다. 미처 대문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집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초록 울타리를 두르기도 전에 집은 연기처럼 자꾸 흩어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주택의 부재들이 하나씩 해체되고, 마침내 집이 서 있던 대지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다. 나는 몹시 초조하다. 옆으로 눈 돌릴 틈도 없이 앞으로만 달려왔던 길고 고단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마침내 생의 마지막을 ‘자연 속에서 처연(凄然)히’ 보내게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나의 집 짓기는 중단되고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다.

나는 열 살 때까지 농촌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아버지는 일찍이 일곱 살 때부터 나를 위해 작은 지게를 만들어주셨고, 소를 다루는 법과 농사 지식을 조금씩 가르쳐주시곤 했다. 당시 나는 크면 당연히 ‘농사꾼’이 되리라고 믿었다. 우리 소가 병으로 쓰러지자 나의 손을 꼭 잡고 뒷산 바위에 올라가 많은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내 미래를 확신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병, 소규모 농사에서 오는 끝날 것 같지 않은 가난, 그리고 자식들의 교육 문제 등이 겹치면서 부모님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농촌을 버리고 도시를 택했다. 할머니는 달걀을 모아 짚으로 고리를 엮어 장날이 되면 고무신이나 바느질거리로 바꾸거나, 가끔 사탕이나 엿을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이사 가는 날 아침에 그 귀한 흰 달걀을 모두 삶아서 시외버스 안에서 하나씩 나누어주셨는데, 나는 소화가 덜 된 보리밥과 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귀한 삶은 달걀을 버스 바닥에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자갈을 밟고 먼지 날리면서 달리던 완행버스에 시달리다 어느새 소음과 먼지가 가득한 도시의 아스팔트에 첫발을 내딛게 된 후, 나는 아직 도시라는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세대(1970년대를 시골에서 보낸 1960년대생)는 시골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차량 정체를 마다하지 않고 나훈아의 ‘고향역’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고생스럽게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한다. 은퇴하면 반드시 전원(아마 그들 마음속에는 시골이겠지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어류를 비롯한 동물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잊지 못하고 죽기 전에 태생지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은 또한 태생지를 떠나서 자신이 오래 살던 곳에 익숙해지면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정주성(定住性)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저앉아 한없이 고민한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노후의 전원생활에 대한 말을 꺼낸 게 10년 전이었다. 아내가 어릴 때 지방공무원이었던 장인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면서 시골 생활을 잠깐씩 경험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혹시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오히려 시골 생활의 불편했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전원생활의 장점들을 조금 과장하고, 단점들은 일부 희석시켜 아내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아내가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 ‘딸을 데리고 둘만 가겠다(딸의 의사를 확인도 하지 않고)’고 협박(?)하기도 했다. 또는 고향 근처나 친척들이 사는 곳으로 가는 방안도 제안해봤지만 아내는 오히려 더 세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내는 세상을 가능한 한 현실적으로 보려고 하고 경제적인 면을 상당히 중시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생각하는 소위 ‘허황한 꿈’을 잘게 조각내고 ‘현실과 경제’라는 껍질을 씌워서 강아지 간식 주듯 아내와 딸에게 하나씩 던져주곤 했다. 드디어 나의 작전이 결실을 보게 된 걸까? 아내가 어느 날 태블릿으로 농어촌주택이나 전원주택 경매와 매매 관련 동영상을 보고 있는 걸 우연히 목격했다.

“멋진 집이네.” 나는 슬쩍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한 유명 유튜버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동영상이었는데, 소개된 집은 제법 규모 있고 멋진 강원도에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당신이 하도 전원생활, 전원생활 하길래 한번 들어가 본 것뿐이야. 전원주택이 관리하기도 힘들고, 난방비·유지비도 많이 든다고 하던데? 무엇보다 전원주택이 요즘 인기가 없대.”

아내가 손가락을 들어 태블릿의 화면을 바꾸려는 순간, 나는 얼른 전원에서 살면 좋은 점을 맹렬한 기세로 재차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후진적이고 낙후되고 구석진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전원’이라는 단어를 애용(?)하고 있다.) 특히 미래의 손자들에게 농약이 묻지 않은 무공해 음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강조하려고 했다. 나는 은근슬쩍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더욱 고삐를 당기려고 했지만, 아내는 태블릿 화면을 탁 닫고는 휑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9개월 후면 나는 사람과 일로 부산하던 직장을 떠나 가차 없이 세상의 뒤편으로 밀려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우연히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다 명함 뭉치를 발견하고 명함 위의 이름에 해당하는 얼굴을 떠올려보고는 잃어버렸던 추억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거나,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기억력이 감퇴하고 사람과의 접촉 빈도가 낮아지다 보면 언어 구사나 논리적 사고 능력이 상실되고, 자존감이 점점 약해지며 무력해진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듯 마음속으로 두 개의 문장을 외치곤 한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혼자 남겨지고 혼자서 살다가 결국 혼자서 죽는다.”

석가모니를 비롯한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고독을 즐기고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혼자라는 것. 지금 함께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각자 흩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죽어간다. 순서는 있겠지만,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고독이 두려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말을 섞고, 웃음을 섞고, 공허한 생각들을 섞은 뒤 집에 돌아가 이불 속에 누우면, 자신이 그들에게 배제되지 않기 위해 소중한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나를 욱여넣음으로써 진정한 나를 버리게 된다면 짧은 인생에서 남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게 고독은 혼자 있으나 둘이 있으나, 여러 명이 모여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온다. 혼자만의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을 존중할 줄 안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면, ‘혼자 남겨짐’이 두려워서 자꾸 사람들 사이에 끼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국 혼자 남겨지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또는 창작)뿐일지도 모른다.”

은퇴 후에 경제적 요구, 혹은 의미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자격증 뭉치를 소중히 옆구리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기업체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너무 좁거나 아예 닫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게 현실이다. 설령 어찌어찌해서 밀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문을 나오게 된다. 체력적인 한계가 가장 큰 장애겠지만, 현실적으로 젊은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은퇴자는 가족의 생계가 달린 소중한 퇴직금을 긁어모아 사업이라는 도박에 뛰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몇 년 지나서 남는 것은 망가진 몸과 지친 마음뿐이고, 더욱이 의지할 가족들마저 흩어져버린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농촌에서 죽는 날까지 호미와 쟁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선조들을 기억한다. 농사는 체력의 한계선까지도 가능한 일임을 자주 보아왔다. 과거 나의 선조들(부모 이전 세대)은 오직 벼농사와 고추·깨 농사 이외에는 농사로 보지 않았다. 마을 사람 누군가가 채소·과일·버섯·유자 농사라도 지을라치면, 마을 원로들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고 담뱃대를 휘두르면서 쓸데없는 짓 한다고 야단치기 일쑤였다. 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던 그들에게는 오직 쌀과 보리만이 농사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농사는 과거의 농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파인애플·바나나 등 외국에서만 재배되던 열대과일까지 재배되고 있으며, 봄에만 수확되던 딸기를 이제는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비자들은 청결한 무농약 채소나 당도 높은 품질의 농산물을 원하고 있다. 공업과 서비스업이 발전하면서 1차 산업인 농사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지만, 먹거리 확보는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 생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이 떠난 요즈음 농촌에선 산 중턱까지 점령했던 산밭들은 예전의 산으로 복귀한 지 오래고, 기름진 논밭들도 잡초가 사람 키만큼 자라서 아예 농토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을 농어촌에서 보낸 세대에게는 농사를 떠나 ‘시골’은 그저 무한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 세대가 농촌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게 된다면, 후손들이 땅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라도 갖게 되지 않을까?

아내가 생각하는 시골 생활 기피 원인을 하나하나 곰곰이 생각해본다. 첫째로 방범이 취약하다.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밤이 되면 어둠만이 남게 된다. (혹시나 나쁜) 사람뿐 아니라 (호랑이는 없으니 멧돼지 정도의) 산짐승들이 쳐들어올지도 몰라 불안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운전을 못 하는 아내가 혼자서 성당이나 병원에 가기가 너무 힘들고, 셋째는 벌레나 동물을 무서워해서 수많은 벌레와 곤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나이 들어 늙으면 사랑하는 자식들이나 친구들 가까이 있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식물에 대한 애정도 있다. 또한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나 주어진 의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고들어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귀농이나 농촌 관련 방송이나 동영상을 열심히 찾아보고, 지자체 도농 간 연계 사이트를 기웃거리거나 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신청도 해본다. 젊은 시절에는 나이 들어 직장을 그만두면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앞서간 선배들의 경험과 지식을 참고해 틈틈이 전원주택과 온실 설계도를 그려보거나, 농·어촌(어촌도 고려한 적이 있었다)에서 살아갈 방안(연금 70%, 농어업 30%)이나, 난방비와 관리비 등에 관한 구체적인 대책도 세워보곤 한다.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들이 땅과 농가를 이미 마련했고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내려갈 거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듣게 될 때마다 마음이 한껏 조급해지곤 한다. 나도 경제적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데 말이다. 결국 가장 큰 장애이자 난제(難題)는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혼자 내려가서 살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노년에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컸다. (서울에 살고 있는 아는 여자의 남편은 55세에 대기업을 은퇴하고, 여자가 농촌에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하자 혼자 횡성에 내려가 7년째 농사를 지으며 잘 살고 있다고 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잠시 중단됐던 나의 집을 계속해서 완성해보기로 한다. 대지는 마을과 조금 떨어지고 뒤로는 아담한 언덕이 있는 삼백 평 남짓. 집은 작은 2층짜리 남향으로 철근콘크리트나 목조로 짓고, 1층에는 나와 아내가 거주하면서 주변 경치와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통유리창을 달 것이다. 거실 벽에는 러시아식 벽난로(페치카)를 설치해도 좋을 듯하다. 2층에는 방 두 개와 화장실을 배치하고, 특히 딸아이를 위해 베란다 공간을 남겨놓아야 한다. 마당에는 고운 잔디를 깔고 대문 위로 장미 넝쿨을 올리면 이곳에서 아이들이 ‘작은 결혼식’을 할 수도 있고, 손자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도 있을 것이다. 집 옆쪽에는 소규모 유리 온실을 마련해 계절에 상관없이 방울토마토·딸기·참외 등을 따먹을 수 있도록 하고, 집 뒷마당이나 앞마당에 공간이 있다면 텃밭을 만들어 상추·고추 등 채소나 맨드라미·봉숭아 등 꽃을 조금 심어보자. 초록색 철제 펜스로 담장을 둘러 개방감을 주고, 담장을 따라 화살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으면 가을에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당 가장자리마다 대추나무·감나무·포도나무 등 과실수를 몇 그루 기르고, 대문이 있는 쪽에는 벚나무도 심어 봄이 되면 꽃잎이 휘날리고 가을이면 붉고 노란 단풍잎이 떨어져 마당을 가득 채울 것이다. (소나무나 버드나무는 꽃가루가 심하게 날리니 심지 않는 게 나을 듯!)

특히 아내의 방범(防犯)에 대한 우려를 없애고 적적함을 덜어주기 위해 사방(四方)에 태양광 가로등을 설치하고, 리트리버나 거위 한두 마리를 키우자. 닭을 키워 싱싱한 달걀을 얻거나, 마을에 놀고 있는 밭을 빌려 고구마나 감자를 재배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마트·백화점·병원을 이용하기는 불편하겠지만, 먹거리를 위해 마트에 자주 갈 필요가 없어지고 불필요한 병원 진료가 줄어들게 되겠지. 어느 정도 농촌 생활에 적응되면 본격적으로 농사에 손을 대보자. 미숙하게나마 뿌려둔 씨앗들이 연초록 싹을 틔워 올리고 줄기와 잎들이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라 군악대처럼 멋지게 도열(堵列)해 우리를 반겨준다면 아내의 가슴에도 보람과 뿌듯함, 그리고 사랑이 함께 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꿈도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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