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라디오DJ, 서울시 최초의 건강총괄관으로…

노년내과 진료실을 지키던 정희원 교수는 어느 날 그 자리를 조용히 떠났다. 방송과 책, 유튜브를 통해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지만, 그가 택한 다음 행보는 조금 의외였다. 라디오 DJ로 사람들의 일상에 말을 걸고, 서울시의 ‘건강총괄관’이라는 새로운 자리에 올라 정책 자문을 시작한 것. 이제는 가장 잘 알려진 의사 중 한 명이 된 그를 만나 계속된 변신의 이유에 대해 들어보았다.
정희원 박사와의 첫 번째 인터뷰는 그가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상은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평범한 의사와는 달리 카이스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노년내과라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저속노화 식사법’ 등 그의 저서는 대중을 움직였다. 각종 기사로 주요 매체를 장식하더니, ‘라디오스타’, ’유 퀴즈 온 더 블럭’ 같은 온 국민이 알 만한 TV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비쳤다. 그렇게 유명세는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이번 두 번째 인터뷰 때는 예민한 시점이었다. 서울아산병원 교수직을 내려놓고 라디오 DJ라는 누구나 의아해할 만한 행보를 보이더니, 서울시 최초의 건강총괄관에 위촉된 직후였다.
그사이 그를 둘러싼 호기심은 다소 변질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전하는 정보보다 그의 말이 누구를 향하는 건 아닌지, 행동의 이면에 숨겨진 욕심이 가려져 있지는 않은지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진료실 문 열고 세상으로
유명세는 서울아산병원 시절부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론이 많은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은 좋았지만, 그를 찾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이 진료실을 메우기 시작했다.
“건강염려증이거나, 저를 찾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이 전국에서 오셨죠. 몇몇 분은 반복적인 진단을 계속 요구하셔서 쉽지 않았습니다. 1년치 외래 예약이 하루에 마감되는 상황이 됐어요. 하지만 약 조절이나 노쇠 개선 등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의 환자는 오히려 많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진료실에서 제가 느낄 수 있는 자기 효능감이 크지 않은 상황이 된 거죠. 여기에 의정 갈등까지 발생하면서 당직 같은 업무도 늘었고, 정작 제가 알리고 싶은 메시지 전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은 더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말 그대로 ‘가속노화’를 스스로 느끼고 있던 상황,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MBC에서 제안을 받았다. 라디오 DJ라는 생소한 자리. 하지만 유튜브나 SNS를 통해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을 접한 터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더 많은 사람의 건강상태를 개선하려면, 건강 정보가 난무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라디오가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어요. 제작진의 취지도 좋았고, 다양한 세대와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죠.”
실제로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 MBC 표준FM ‘정희원의 라디오 쉼표’ 인터넷 게시판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러 사연이 올라온다. “떡볶이를 먹는데 밥까지 먹으라는 엄마가 이해 안 된다”는 초등학생의 사연부터, “손주에게 체리를 사줘도, 무가당 주스를 사줘도, 당뇨병 걸린다는 딸 때문에 힘들다”는 74세 할아버지까지 그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애청자들이 몰려든다.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유튜브 채널 ‘정희원의 저속노화’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흥미와 재미보다는 ‘정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주제마다 해당 분야 전문의를 통해 문제를 들여다보고, 인기나 조회수, 청취율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걷는다. 입에 발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진행해온 라디오 프로그램 목록이나 유튜브 리스트를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손해라는 것을 알죠. 라디오나 유튜브는 대중적 인기가 중요한데, 딱딱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면 콘텐츠를 제작하는 입장에선 손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만큼 정론을 최대한 추구하는 흔치 않은 스피커가 되고자 합니다.”
서울 시민의 건강을 향해
7월 31일 서울시는 정희원 박사를 초대 서울건강총괄관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건강총괄관’은 서울시가 초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고 건강 중심 시정을 펼치기 위해 처음 도입한 제도로, 임기는 2년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99세까지 팔팔하게 건강하자는 의미가 담긴 서울 대표 건강관리 플랫폼 ‘손목닥터9988’의 핵심이 바로 정 박사님의 ‘저속노화’에 있다”며 “앞으로 ‘건강’을 시정 중심 가치로 끌어올리고, 일상에서 체감하는 건강 정책의 변화를 견인해 서울이 세계적인 ‘건강 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시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간 자문관이라고는 하지만 서울시 역사상 세 번째인 ‘총괄관’이라는 자리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건강 분야의 총괄관은 그가 최초다.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
“어쩌면 보건복지부 장관보다 더 많은 분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앙정부나 정부 부처에 비해 의사결정과 정책 반영이 빠른 곳이니까요. 또 좋은 결과를 내면 다른 지자체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테니까요.”
정희원 박사가 진료실을 떠나 서울시 건강총괄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분명하다.
“진료실 안에서만 건강을 이야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전 국가적인 단위에서 더 많은 사람의 건강상태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죠.”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한국 사회가 가진 건강 체계의 구조적 공백이다.
“우리나라엔 급성기 의료는 있지만, 그 이전과 이후가 없죠. 질병 발생의 예방, 돌봄으로의 연계, 시민의 욕구 평가, 예방 중심의 구조가 전혀 없어요. 사실상 한국의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보다 뒤처져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정 박사가 제안하는 해법은 단순한 서비스 확대가 아닌, ‘돌봄 수요 자체를 줄이는 시스템’이다. 일본의 ‘개호(돌봄) 예방’ 정책을 참고해, 노쇠를 조기에 진단하고 재활과 사회참여를 연계하는 통합 서비스를 지역 단위로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한 거점으로 그가 주목하는 곳은 ‘건강장수센터’다.
“의료·복지·돌봄이 통합된 플랫폼으로 만들고 싶어요. 공공 의료기관의 노인의학 클리닉과 건강장수센터를 연계하는 방식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고위험군을 가려내고, 이를 건강장수센터와 복지 서비스로 연결하면 의료와 돌봄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말하는 가이드라인 중 하나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ICOPE(Integrated Care for Older People, 고령자 통합 돌봄) 모델’로, 전 세계 고령사회 대응의 새로운 표준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의 질병 중심 의료 체계를 넘어, 고령자의 기능 저하를 예방하고 조기에 개입해 건강수명을 연장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WHO는 고령자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를 ‘질병 유무’가 아니라 이동·영양·시각·청각·인지·심리 등 6대 핵심 기능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선별·관리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또한 그는 “현재 서울시가 시행 중인 손목닥터9988을 좀 더 고도화해서 ‘걷기’ 중심에서 노쇠 방지에 절대적인 근력운동까지 확대하고, 이 과정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정책에 반영하는 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은 ‘과학’
그의 이러한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까? 어떤 신념을 바탕으로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믿음이나 종교가 아닌 과학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다.
“제가 정책 제안을 하는 내용은 이미 WHO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연구되고 가이드라인이 확립된 내용이에요. OECD 보고서에도 등장하고. 싱가포르 같은 국가에서 실험도 끝나 개념이 확립된 ‘증거에 입각한 정책’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과학적인 연구 방법론에 의해 도출된 사실입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그를 보면서 “돌고 있는 것은 천체가 아니라 지구”라고 말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떠올랐다. 연구를 통해 확립된 이론이 있고 실행만 된다면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그것을 현실에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안타까움.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이 얽혀 있는 항변처럼 보였다. 그간 유명세로 인해 여러 정부 기관, 학회, 위원회 등에 불려 다니면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부정적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경험이 서울시에서도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에요. 벽에 부딪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필요하면 시장님을 찾아가서 직접 의견 개진도 하고요. 아니면 라디오나 유튜브를 통해 의견을 전할 수도 있고, 칼럼이나 기고가 대안이 될 수도 있겠죠. SNS 한 줄만 써도 수십 개씩 기사가 나는 상황이니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자문’하는 사람이니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죠.”
일각에서는 그의 이러한 활동이 정치권 진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정 박사는 “체질상 맞지 않는다”고 딱잘라 말한다.
“실제로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스킨십을 쌓거나 차담을 하는 등의 정치 행위는 저랑 맞지 않아요. 만약 제가 특정 정당을 선택한다면 나머지 지지자들은 제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아니에요. 전 정확한 정보만 전달하고, 체계가 개선되도록 돕고 싶을 뿐입니다. 정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진료실 안에서 호기심을 자아내던 독특한 의사에서 서울 시민의 건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리로 옮겨 섰다. 2년의 임기 동안 서울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과거 “결국 갈릴레이가 옳았다”고 말하던 이들처럼, 훗날 우리 역시 분명한 진보를 기분 좋게 체감하며 그렇게 인정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