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겸재 정선, 붓끝으로 진경(眞景)을 거닐다
‘내가 시를 보내면 자네가 그림을 보내주게(詩去畵來之約 시거화래지약).’ 정선(1676~1759)의 ‘시화환상간’에 사천 이병연(1671~1751)이 남긴 글귀다.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시와 그림을 통해 벗과 우정을 나누는 소탈한 모습도 지녔다. 겸재 정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과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8세기 조선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정선은 ‘겸손할 겸(謙), 공경할 재(齋)’를 아우른 겸재를 호로 사용했다. 이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한다’는 뜻으로, 그의 인생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흔히 정선을 도화서의 화원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서울 청운동 양반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현령까지 지낸 문인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났기에 정선은 조선뿐 아니라 청나라까지 알려졌으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양반에 대한 천시와 시기 섞인 상소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선은 작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우리나라의 실제 자연경관을 묘사하고 느낀 감정을 담아 ‘참(眞) 경치(景)’를 그려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조선 회화의 독창적 지평을 열었다.
총 165점(국보 2점, 보물 57점 등)을 선보이는 전시는 2부로 나뉘며, 1부 ‘진경에 거닐다’에서는 진경산수화의 시작과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정선이 처음 그리기 시작하고 다양하게 변주한 금강산과 한양, 개성, 포항 등 각지의 명승지가 화폭에 펼쳐진다. 2부 ‘문인화가의 이상’에서는 문인화, 화조화 등 여러 주제의 작품을 통해 정선의 예술적 깊이는 물론 그가 가지고 있던 문인의식과 집안에 대한 자부심까지 엿볼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호암미술관 주변에는 한국 전통 정원을 그대로 재현한 ‘희원’이 있다. 연못의 초록 연잎 사이로 장 미셀 오토니엘의 작품 ‘황금연꽃’이 어우러져 있으며,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형 설치 작품 ‘엄마(마망)’가 자연과 조화를 이뤄 특별한 감동을 자아낸다. 초여름의 문턱, 푸르른 자연으로 둘러싸인 호암미술관에서 정선의 붓끝이 남긴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껴보길 바란다.
주요 작품

진경산수화의 대표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76세에 그린 작품으로 국보이자 이건희 컬렉션의 대표작이다. 여름날 비 온 뒤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 ‘제색(霽色)’은 비나 눈이 갠 후의 산빛이나 하늘빛을 의미하며 조선 문인들이 시에서 즐겨 사용한 표현이다. 평소에는 흰색에 가깝지만 비에 젖어 짙은 색으로 변한 바위와 소나무, 개는 하늘과 운무 속에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 봉우리의 웅장함이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5월 초까지 전시된 후 해외 순회 전시를 떠나 당분간 감상이 어렵다.
‘인왕제색도’, 조선,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cm,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회장 기증, 국보.
겨울 금강산(개골산)의 모습을 담은 ‘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산은 조선시대 최고의 인기 여행지였음에 틀림없다. 정선도 몇 차례 금강산을 다녀온 후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듯 화폭에 표현했다. 드론도 없는 시절인데 말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한눈에 보이는 단발령에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된다. 뾰족한 암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을 점과 선으로 대비시켜 입체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금강전도’, 조선,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담채, 130.8×94.5cm, 개인 소장, 국보.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바꾸어 함께 보다
소나무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은 ‘경교명승첩’에 실려 있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관할 지역 풍경과 한강 주변 명소를 그려 보내면 사천 이병연이 시를 붙여 모은 화첩이다. 정선이 1740년 양천 현령(현 서울 가양동)으로 떠날 때 시와 그림으로 소식을 전하길 약속했고, 완성된 작품을 함께 보며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보인다. 오른쪽 상단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을 찾아보자.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말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시화환상간’, 조선, 18세기 중엽, 비단에 담채, 29.5×26.4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나는야 이황의 후손! ‘계상정거(溪上靜居)’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을 그린 이 작품은 1000원권 지폐 뒷면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이 실린 ‘퇴우이선생진적첩’은 정선의 그림과 이황의 친필 서문 등이 합쳐진 서화첩으로, 전시장에서는 이황의 글이 정선의 외가까지 전해진 가계도를 볼 수 있다. ‘계상정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좌하고 있는 이황이 보이는데, 정선이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담은 터라 매우 흥미롭다.
‘계상정거’, 조선, 1746년, 종이에 수묵, 25.4×40.0cm, 삼성문화재단, 보물.
전시 정보기간 : 6월 29일(일)까지 시간 화~일요일, 10:00~18:00
장소 : 호암미술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
관람 요금 : 7000~1만 4000원 정규 도슨트 평일 14시, 16시(무료)
순환 셔틀버스 : 평일 리움미술관(서울)↔호암미술관(용인) 운행, 사전 예약 후 탑승(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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