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유산 순례기] “발굴 안된 유물, 얼마나 나올지 가늠도 어려워”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로 가는 여행은 즐겁다. 유적을 볼 수 있어서다. 야박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백제의 왕도였지만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은 걸 아쉬워하는 촌평이 그렇다. 물론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부여는 유형의 유산과 무형의 정신적 유산이 겹친 역사의 큰 곳집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이후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문화 융성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패망의 상처와 비운의 망국사, 그리고 전란의 파괴적인 횡포를 간신히 모면한 유적들을 남긴 채.
부여 읍내에 있는 정림사지로 들어선다. 백제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번성했다. 절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찰이 정림사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직후 지은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만 남아 과거를 웅변한다. 너른 절터 복판에 우뚝 선 이 석탑의 체구는 웅장하다. 백제의 풍성한 문화 양상을 너끈히 대변하고도 남을 만큼 고품격 이미지를 풍겨 당당하다. 이는 백제를 알리는 부여의 사실적인 유적 중 지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왕궁지나 왕릉 등 나머지 유적은 지하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선 고독한 탑이다. 홀로 눈부신 해 아래에 서서 망국의 어두운 역사를 읊조릴 수밖에 없는 배역이 주어졌으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늘날 우리가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여느 오층석탑들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많은 석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형상을 닮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탑은 한국 석탑의 시조다. 고대 불탑의 특징이던 목탑 중심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의 경위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 역시 동일한 반열에 놓여 있다.
무왕은 왜 석탑을 구현했을까? 삼국시대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다. 백제는 중국식 불교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백제만의 기법으로 소화해 일련의 개성을 돋우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석탑 문화다.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목탑은 화재를 견딜 만한 재간이 없는 등 내구성에 문제가 많다. 그래 석재를 동원해 탑을 만들었다. 단단한 돌을 깎아 섬세한 불탑을 만드는 일이 쉬웠으랴. 그러나 백제엔 난처한 일도 아니었다. 부여 천도를 위한 계획도시를 만들면서, 또는 왕가의 석실 무덤들을 조성하면서 이미 능란하게 습득한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높이는 약 9m에 달한다. 탑의 기단부터 상륜부까지 탑신 전체에 발휘된 세부 수법조차 세련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 탑은 목탑의 조형미를 석재로 빚어냈다. 돌을 나무 다루듯이 해 전례가 없던 석탑을 만들었으니 비범한 창의의 산물이다. 특히 버선코처럼 살짝 들어 올린 옥개석의 모습이 아름답다. 일찍이 한국 미술사 연구의 기반을 닦은 우현 고유섭은 이 탑을 ‘소재 정리의 규율성과 율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최고의 석탑’으로 꼽았다.
탑의 피부는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톤이 어둡다. 탑을 후려친 세월의 자국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 때 부여는 무려 7일 밤낮에 걸쳐 불에 탔다고 한다. 이때 번진 불길이 석탑을 휘감으면서 생긴 상흔으로 추정된다. 이는 소소한 수난에 불과하다. 더욱 기막힌 건 석탑의 1층 몸돌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을 지닌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 넣었다는 데에 있다. 소정방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쳐 부여에 딱 부러지는 전공비를 건립하는 대신, 백제의 정신적 심장부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비석 삼아 얼렁뚱땅 글을 새겼다. 이후 석탑은 오랫동안 평제탑(‘대당평백제국비명’의 약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심지어 이 탑을 소정방이 만든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석탑이 겪은 오욕이 이렇게 자심하다.
백제의 역사가 왜곡된 사례는 소수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낙화암 삼천 궁녀 얘기’는 팩트를 찾을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백제 멸망을 초래한 의자왕 깎아내리기 역시 가혹하고도 집요하게 자행됐다. 근래 들어 의자왕이 무능한 것만은 아님을 증명하는 기록에 입각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진 건 그나마 다행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입맛대로 윤색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패자의 역사는? 당연히 되살려야 한다. 역사는 특정 세력의 전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와
발길은 이제 궁남지에 닿는다. 이건 백제 무왕 때 조성한 한국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이자 정원이다.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추정한 요지가 그렇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웠다.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다.’ ‘삼국사기’의 다른 페이지에도 궁남지 소식이 나온다.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한 것. 이는 이 연못이 궁원지(宮苑池)임을 알게 하는 단서다. 연못 동쪽 언덕에선 백제 때의 초석과 기와 파편 등이 출토됐는데, 이곳은 왕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 태자궁이나 세자궁을 달리 이르던 말)의 옛터로 추정된다. 이렇게 궁남지의 조성 내력과 형태는 대체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탄생 설화가 등장한다. ‘무왕의 어머니는 남지(南池, 궁남지) 둑에서 혼자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가 서동인데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발칙한 향가 ‘서동요’를 지어 신라에 유포, 성공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마침내 왕위에 오른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다. 이런 내력으로 궁남지는 서동요의 배경지이자 무왕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는 역사 명소로 또렷이 부각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궁남지의 진면목은 다 드러나지 않았다. 미처 설명되지 않은 틈이 많아 이견과 논란이 잦다. 앞으로의 발굴 결과에 따라서는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 궁남지만의 일은 아니다. 부여에선 땅을 파면 수시로 유물이 나온다. 부여의 역사는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찬국 부여문화원 원장“유물, 어디서 또 나올지 알 수 없어”
백제 26대 성왕부터 31대 의자왕까지 12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지하엔 많은 유물이 매장돼 있는 걸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발굴 작업이 거듭되었으며, 현재에도 왕궁터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계속 발굴해야 한다.” 정찬국 부여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백제는 문화 강국으로서 찬란한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많은 유적이 사라지거나 땅에 묻혔다. 이를 발굴해 보존하는 게 지역사회의 숙원이자 숙제다.
“백제 패망 때 부여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목조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백제 문화의 원형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매장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필연적이다. 뜻밖의 상황에서 유물이 나오기도 한다. 1993년 왕릉원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경우가 그렇다. 이는 우연히 출토된 것이지만 반향이 엄청났다. 완벽한 예술성과 사상성이 담긴 세계적 작품이자 백제 문화의 정수로 평가되었으니까.”
(주민욱 프리랜서)
백제의 고도라는 역사성과 관련한 지역 정서의 특질이 있다면?
“백제의 후예로서 주민들의 자긍심이 완연한 지역이다. 긍지를 가지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들도 많다. 비록 군 단위 농촌 지역이지만 문화 역량은 어느 지역보다 뛰어나다. 한편 갑작스럽게 백제가 멸망하면서 초래된 한(恨)의 정서가 지역 저변에 깔려 있기도 하다. 특히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폄하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폄하의 사례를 하나 든다면?
“백제는 문화 강국에 그치지 않았다. 해상 강국으로서 국제 교류도 매우 활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록물에는 그런 사실이 축소돼 있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관련 기록이 더 많다.”
역사적 가치에 비해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유적은?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취락 유적인 ‘송국리 선사유적’을 꼽을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과 북벌에 공감하는 글을 나눈 백강 이강여 선생의 행적이 서린 규암면의 ‘대재각’(大哉閣)과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도 소중한 유적이다.”
문화원 사업의 중요 프로그램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부여는 국악 등 전통문화가 발달한 반면 현대 문화 측면은 취약하다. 그래서 2014년에 ‘부여청소년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반응이 좋아 성인 단원으로 구성한 ‘부여팝스오케스트라’도 추가로 운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 나태주 시인, 김용택 시인 등을 초청한 바 있는 ‘명사와 함께하는 부여 문화 투어’도 인기를 끌고 있다. 유 교수의 경우 신청자가 몰려들어 47초 만에 접수를 마감했다.”
유홍준 교수는 부여군에 유물 다수를 기증했다지?
“10여 년 전부터 부여 역사를 빈번히 탐방한 그는 부여에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다. 퇴직 후 부여에 살기 위해 이미 거주지도 마련해두었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민속공예품과 서화류 등 소장 유물 600여 점을 우리 군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