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냥 따로 살고 싶어요.”

자녀가 독립하고 은퇴까지 하고 나면 부부 둘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젊을 때는 반가웠을 시간이지만, 오히려 불편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내면서 생활습관부터 돈 쓰는 방식까지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배우자와 법적으로 남이 되는 이혼까지 원하는 것은 아니다. 혼인관계는 유지하면서 각자의 생활을 선택하는 이른바 ‘졸혼(卒婚)’을 고민하는 이유다.
공식적으로 졸혼 인구에 대한 정확한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으다 오랜 결혼생활 끝에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부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통계청의 ‘2024년 혼인·이혼 통계’를 보면 전체 이혼 가운데 혼인기간 30년 이상 부부가 16.6%를 차지했다. 혼인기간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2024년 1만 5128건으로 전년보다 2.25% 늘었다.
왜 이혼이 아니라 '졸혼'을 택할까
졸혼은 법률용어가 아니다. 이혼하지 않고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분리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같은 집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기도 하고 아예 거처를 따로 마련하기도 한다.
졸혼을 고민하는 시기는 대개 삶의 큰 변화와 맞물린다. 자녀가 독립하고 직장에서 은퇴하면 ‘부모’나 ‘직장인’으로 보내던 시간이 줄어든다. 대신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이때 오랫동안 묻혀 있던 생활습관과 가치관의 차이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한다. 남은 인생만큼은 ‘누구의 남편’이나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도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이혼을 선택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만만치 않다. 주거와 생활비부터 재산분할, 가족관계까지 달라진다. 배우자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함께 살기는 힘든 사람에게 졸혼은 일종의 ‘제3의 선택’이 되는 셈이다.
흔히 졸혼을 별거와 같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법적으로 혼인관계를 유지한 채 따로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통상적으로 별거가 갈등이나 이혼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상황까지 폭넓게 가리킨다면, 졸혼은 혼인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졸혼해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
여기서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졸혼을 해도 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로 산 지 1년이든 10년이든 이혼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로는 부부다.
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법정상속인이 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졸혼했다”는 사실만으로 배우자의 상속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재산관계도 자동으로 나뉘지 않는다. 이혼할 때처럼 재산분할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살던 집을 나와 따로 생활한다고 해서 공동으로 형성한 재산의 소유관계까지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졸혼은 단순히 ‘집을 따로 얻으면 끝나는 문제’로 접근하기 어렵다. 특히 노년에는 생활비와 주거뿐 아니라 질병과 간병 문제가 뒤따른다. 평소에는 각자의 삶을 살더라도 한쪽이 크게 아프거나 돌봄이 필요해졌을 때 다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졸혼, 해도 괜찮을까
졸혼이 관계를 편안하게 만드는 부부도 있을 수 있다. 한집에서 사소한 일로 부딪히던 부부가 거리를 둔 뒤 오히려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다. 서로의 생활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는 가족으로서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반대로 졸혼 자체가 갈등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만 졸혼을 원하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려운데 성급하게 생활을 분리한다면 기존 갈등에 돈과 주거 문제까지 더해질 수 있다.
그래서 졸혼을 고민한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고 싶은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싶은가.’
후자라면 반드시 집부터 나눌 필요는 없다. 같은 집에서 각자의 방과 시간을 확보하거나 가사와 생활비 분담 방식을 다시 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일정 기간 떨어져 살아본 뒤 장기적인 졸혼 여부를 결정하는 방법도 있다.
무엇보다 실제로 따로 살기로 했다면 감정적인 합의에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비는 각자 부담할지 공동으로 부담할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누가 사용할지, 예금·부동산 등 재산은 어떻게 관리할지, 아프거나 간병이 필요해졌을 때 서로 어디까지 책임질지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둘 필요가 있다.

졸혼은 결혼을 끝내는 것보다 부부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선택에 가깝다. 그래서 ‘졸혼할까 말까’보다 중요한 질문은 ‘졸혼한 뒤 어떻게 살 것인가’다.
함께 살지 않는다고 법적인 부부관계가 사라지는 것도, 서로 얽혀 있는 돈과 가족의 문제가 저절로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이혼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고 싶다면, 자유만큼 책임을 어디까지 나눌지도 함께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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