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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던 날의 불화

기사입력 2018-12-12 08:43

[동년기자 페이지] 눈처럼 아득한 추억들이 흩어지네

영화의 한 장면이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챈 부인. 별다른 표현 없이 서먹하게 마주앉아 있다. 눈 쌓인 스키장이 배경이다. 카페의 활기와는 대조적으로 부부는 어색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몇 마디 무의미한 대화 뒤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남자의 만류에도 여자는 나가버린다. 남은 술을 다 마신 남자가 쓸쓸한 모습으로 주차된 자신의 차로 다가간다. 천지가 흰 눈이다. 차 앞 유리에 수북이 쌓인 눈을 힘껏 손으로 쳐낸다. 남자가 놀란다. 쳐낸 눈 사이로 차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브 몽탕’ 주연의 프랑스 영화로 기억한다. 젊은 여자와 외도에 빠진 남편을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하던 부인의 심정이 잔잔하게 전달되던 영화였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이 영화의 한 장면과 함께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남편과의 견해차, 의식의 차이를 메우려면 긴 대화가 주기적으로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둘이 차를 타고 외곽의 찻집을 찾았다.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 근처의 찻집으로 가는 길가엔 마른 갈대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내려서 갈대도 볼 겸 근처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전원풍의 여유로운 실내장식을 한 찻집은 편안해 보였다. 따스한 난로와 장작, 화분, 예쁜 찻잔 모두가 아늑했다.

주문한 차가 나오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또 나눴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감정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몇 시간 앉아 있었을까. 어느새 어둠이 와 있었고 창밖으로 눈이 펑펑 내렸다. 음악과 뜨거운 커피. 찻집 분위기는 평화롭고 부드러웠지만 답답한 마음 때문에 즐겁지 않았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눈은 더 펑펑 쏟아졌다. 집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셨을 때 언덕을 잘 내려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찻집을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데 발이 푹푹 빠졌다. 걷는 곳이 길이 맞는지 분간이 안 됐다. 차도 눈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눈을 털어내고서야 겨우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하지만 시동을 걸어도 바퀴가 겉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눈이 오며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자 바퀴가 얼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찻집으로 다시 가 뜨거운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은 끓여놓은 보리차를 주전자째 선뜻 내줬다. 뜨거운 보리차 물을 바퀴에 붓자 얼어붙은 것들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래도 길이 너무 미끄러워 조심스러웠다. 브레이크를 잘못 밟기라도 하면 그대로 골짜기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후진으로 엉금엉금 언덕을 내려와야 했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남편은 수신호를 보냈다.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손발이 척척 맞았다. 단결하고 협동했다. 태어나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사람처럼 찰떡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싸우나 마나 한 싸움 중의 하나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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