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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핀 봉선화야

기사입력 2017-08-24 17:33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봉선화. 어린 시절, 그 기나긴 여름이면 초가집의 울밑마다 봉선화가 피었다. 그 봉선화를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해 해방 전후에 태어난 우리들은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고 애처롭게 노래했다. 여성들은 지금의 매니큐어 대신 백반과 섞어 찧은 봉선화 꽃을 손톱에 동여매 곱게 물을 들이곤 했다. 손톱에서 봉선화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빠져나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손톱을 깍지 않고 첫눈이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던 추억 한가닥 씩은 다들 품고 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동네에 크나큰 사건이 일어났다. 치렁치렁 머리를 땋고 다니며 여성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면 이웃집 학순이 언니가 연애를 하다가 사랑이 엇나가자 자살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 집 선산 아래 있는 조그마한 둠벙물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손톱의 봉숭아물이 너무 일찍 빠져나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쑤근거리는 입방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물가를 달구어댔다. 그 둠벙 앞을 지날때마다 머리를 풀어헤친 벌건 손톱의 처녀 귀신이 끌어들일 것 같아 그 길로 지나가질 못하고 늘 먼 길로 돌아다니곤 기억이 난다. 흉흉한 소문을 듣고 아직 소녀였던 나도 곱게 물든 손톱이 자라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의 추억이 가끔씩 낭만으로 남아 울컥 그리운 계절이다.

그 시절 슬프게 피던 봉숭아가 화단에서 당당하고 탐스럽게 꽃을 피운다. 동네 할머니한테서 모종 두 개를 얻어다가 옥상 큰 화분에다 심었는데 옆의 금잔화와 나리를 뒤덮을 기세로 가지를 치다 요즘엔 마디마다 꽃을 피워 제법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당당한 녀석들도 40도가 넘는 한 낮 옥상의 복사열과 싸우다가 오후가 되면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래도 물만 먹으면 다시 일어서서 꽃을 피우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마치 우리의 딸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나는 아침마다 올라가서 손톱에 물들이던 추억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꽃잎을 따다가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주말쯤엔 나도 딸아이와 함께 손톱에 보름달을 띄워 보고 싶다. 그 보름달이 반달이 되고 상현달이 되다가 결국은 첫눈이 올 때쯤 그믐밤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냉정하다. 꿈의 씨앗이 발아하던 소녀시절도, 물오른 한 여름의 청춘도 속절없이 가버리고, 어느새 가을날의 샛길을 서성이고 있으니 봉숭아물이라도 들여 내 손톱에 풍성한 보름달을 띄워보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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