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김동문은 당시 금메달이 확실시됐던 배드민턴 혼합복식 박주봉-라경민 조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4개 대회 연속 우승, 국제대회 7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2011년 세계 배드민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김동문(金東文·44) 원광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초등학교에 배드민턴부랑 야구부가 있었어요. 야구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 대신 장비도 주고 간식도 준다는 배드민턴을 선택했죠.”
김동문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배드민턴과 야구,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사실은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야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배드민턴 라켓을 집어 들었고 그렇게 셔틀콕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후보에서 금메달리스트로
고등학교 1학년 땐 청소년 국가대표로, 이듬해엔 성인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집을 떠나 지금은 없어진 진해선수촌에 입촌했다. 그 당시 2주에 한 번씩 외박이 주어졌는데 마치 군인이 휴가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국가대표라고 해서 모든 선수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대표팀 안에서도 주전에 뽑혀야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 진출할 수 있어 훈련이 아무리 힘들어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웨이트 트레이닝, 모래코트 훈련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저는 뛰어야 하는 체력훈련이 제일 싫었어요.”
그는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히기 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긴 시간 동안 후보 선수로 지낸 탓에 여러 번 배드민턴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고.
“다른 동기들은 주전으로 뽑혀서 운동하는데 저는 후보 선수였어요. 운동하고 싶어도 심부름만 시키니까 당시엔 상처를 많이 받았죠. 운동을 그만두려고 맘먹으려는 찰나에 친구들이 ‘조금만 더 해보자’라고 하더라고요. 친구들이 절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다른 삶을 살고 있겠죠.”
그때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수십 년간 함께 복식 파트너로 활동한 하태권이다. 김동문-하태권 조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1999년 쿠알라룸푸르·2002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 1999년 코펜하겐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등 우승의 영광을 함께 누렸다. 그는 “생애 첫 우승과 마지막 우승을 함께한 친구”라며 “가족과도 같은 존재”라고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하태권 감독과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같이 운동을 시작했어요. 초등학교에서 가장 큰 대회가 소년체전이었는데 저희 둘이 같은 팀으로 출전했죠. 결승전을 앞두고 서로의 손을 꽉 잡고 기도했던 기억이 나요.”
‘기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에서 김동문-하태권 조가 이동수-유용성 조를 꺾고 선보인(?) ‘기도 세리모니’다. 이에 대해 그는 “선배인 이동수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선수랑 결승전에서 만나니 이기더라도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감독님의 지시가 있었어요. 우승하고 나서 하태권 감독이 포옹하려고 다가오는데 제가 ‘태권아, 기도하자’라고 했대요.(웃음) 그렇게 해서 찍힌 사진이 저는 무릎을 꿇고 있고 하태권 감독은 제 머리 위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이에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이용대 선수가 우승한 뒤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날린 일명 ‘윙크 세리머니’는 당시 수많은 누나를 설레게 하며 한동안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에게 우승했던 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새롭게 해보고 싶은 세리머니가 있는지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즐기는 배드민턴을 한 게 아니라 무조건 우승을 목표로 전투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조금 즐기면서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하라고 하면 몸에 배어 있지 않아서 못할 것 같아요.”
배드민턴이 맺어준 인연
김동문은 남자복식뿐만 아니라 혼합복식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김동문-라경민 조는 국제대회 70연승, 14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는 등 8년여 동안 세계 최고의 배드민턴 혼합복식조로 군림했다. 김동문, 라경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5년, 둘은 서로 연인관계였음을 공개, 동시에 깜짝 결혼 소식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경기 결과가 항상 좋을 순 없잖아요. 그럴 때 경기력 저하의 원인을 연애로 볼까봐 공개연애는 하지 않았어요. 다행히 복식 파트너여서 그런지 같이 밥을 먹고 챙겨줘도 저희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함께 운동하다 보니 서로 붙어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마음이 잘 통했던 것 같아요.”
한국 최강은 물론 세계 1위까지 올라간 김동문-라경민 조는 혼합복식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 8강에서 중국의 장준-가오링 조에 일격을 당했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도 8강에서 탈락, 유난히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올림픽 시작 전에 방송사에서 예상 순위를 공개하잖아요. 그때 저희 조가 금메달 1순위도 아닌 0순위로 이름이 올랐어요. 근데 8강에서 떨어진 거죠. 한동안은 아쉬워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였어요.”
그는 이겼던 경기보다 진 경기가 더 생각난다며 그중에서도 1점 차이로 우승을 놓친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를 꼽았다.
“이때 결승전에서 장준-가오링 조를 다시 만났어요. 1년 전 시드니올림픽에서의 패배를 꼭 갚겠다는 각오였죠. 경기 초반엔 잘 안 풀렸어요. 10대 3 정도로 크게 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한 점 한 점 따라붙으니 동점까지 만들어지더라고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엔 결승점을 내주는 바람에 17대 16으로 졌어요. 이때 이겼으면 세계선수권대회 혼합복식 3연패가 가능했을 텐데… 많이 아쉽더라고요.”
그는 같은 팀에게 연달아 패배한 이유에 대해 “정신력 싸움에서 졌다”고 토로했다.
“지는 경기를 많이 해봐야 했는데 그런 경험이 별로 없었어요. 거의 모든 경기에서 이기다 보니 저희가 지고 있을 때 헤쳐 나가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역전 기술이 부족해 점수에서 밀리고 있을 때 뒤집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지더라고요.”
한편 그는 가장 힘들었던 상대로 장준-가오링 조가 아닌 다른 팀을 꼽았다. 바로 자국 선수들과 만났을 때가 가장 어렵다는 것.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니까 제일 힘들죠. 그래서 서로 연습할 때도 절대 안 지려고 했어요.(웃음)”
후학 양성에 힘 쏟고 싶어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복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동문은 미련 없이 코트를 떠났다. 당시 영국, 프랑스 등에서 대표팀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캐나다 유학길을 선택했다. 이후 모교인 원광대학교에 사회체육학과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현재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솔직히 편한 건 선수 때가 더 나은 것 같아요.(웃음) 처음엔 해보지도 않은 수업 준비도 해야 했고 또 엉뚱한 수업을 맡게 되면 거기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근데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나서 돌이켜보니 감독이라는 자리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더라고요. 참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배드민턴은 무엇인지 물었다.
“제 인생에서 배드민턴을 빼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뭐랄까… 배드민턴은 저에게 많은 과제와 책임, 기쁨과 희망, 그리고 지금의 ‘김동문’을 있게 해준 참 고마운 존재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