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가 만난 사람] “스물한 살 청년이 짝사랑한 나라”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