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가 만난 사람] 자연스럽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는 장애인 챔버 오케스트라로서 국내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서 있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손인경(51) 단장은 한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으며 예일대 음악 박사를 취득한 전문가로서, 1999년에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올해로 18년째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 그녀는 스스로도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북한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그녀를 만나 사랑 챔버에서 사랑을 지휘하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작게 애기 활~ 둘둘셋, 셋둘셋, 크게 쫙쫙 시원하게, 미혜씨 한 번 더 멈추고 혼자서~ 멀리 둘, 파~ 둘, 올리고 내리는 활 부드럽게, 선생님 손만 봐요, 낮음 미~~ 참아야 해요, 너무 잘해서 한 번 더, 참 잘했어요~”
매주 화요일 ‘사랑 챔버’ 연습실에서 손인경 단장의 암호 같은 손놀림으로 화음이 미묘하게 달라졌고 쩌렁쩌렁 악기들이 울렸다.
손 단장의 암호에 가까운 신호와 몸짓은 단원들만을 위한 특별한 지휘처럼 보였다. 그녀는 눈빛과 표정, 손 모양으로 단원들 개개인에게 사인을 주며 가르친다. 아이들을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쓰다듬어주고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느 보통 아이들과 똑같이 말이다.
통제가 어려운 지적 장애 단원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악보도 모르고 악기를 어찌 다루는지도 모르던 단원들이 이제 연주로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치유하는 작은 선교사들이 됐어요. 아이들과 코드를 맞추고 적응해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성장했어요. 제가 아이들한테 배워요.”
학부모님, 악기 선생님, 자원봉사 선생님, 단원들. 100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불쑥 의자에 서 있는가 하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돌아다니거나 빽 소리를 지르고 울고 웃고 떠드는 60명의 단원들 곁에는 사랑이 넘치는 학부모와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손 단장은 코스모폴리탄으로서 한국인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부터는 홍콩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셔서 저도 피아노를 가까이 하게 됐죠. 그런데 어느 날 기타를 치는 사람이 멋있어서 고무줄로 기타 비슷한 걸 만들어 놀았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어머니가 기타는 커서 안 된다면서 대신 바이올린을 사주셨어요. 그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고 콩쿠르에 나가 입선하고 신문기사에도 나고 칭찬도 받았죠(웃음).”
그저 칭찬만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리매김한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음대 음악 박사까지 취득한다. 그리고 1990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사촌오빠를 따라갔다가 온누리교회와 만나게 됐다.
거룩한 부담감으로 시작된 오케스트라
“1999년 4월 1일에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씨의 독주회를 가서 볼 일이 있었어요. 독주회였는데, 그날 앙코르를 받고 풀 오케스트라 세팅으로 남학생들이 나와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웨이’ 등을 연주하더군요. 알고 보니 보육시설인 부산 소년의 집 학생들이었어요. 보육시설에서 지내는 그 아이들이 미사시간에 떠드니까 악기를 쥐어주면서 연주가 시작된 것이라고 들었어요. 그 많은 애들을 대체 누가 가르쳤을까, 충격을 받았죠.”
‘나는 뭘 하고 있지, 나누지도 못하는구나’라는 반성을 하게 됐고 그와 같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생각은 부담감으로까지 발전했다.
“목사님이 ‘뭔가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하셨죠. 이것이 그 거룩한 부담감인가 싶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장애인 오케스트라를 떠올렸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은 소마마비 장애가 있어도 국제적으로 성공한 연주자가 됐잖아요. 한국의 장애아들 중에도 재능은 있는데 선생도 없고 악기도 없고 지원도 없어서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숨어 있는 이작 펄만이 있을 것 같았어요.”
온누리교회 집사인 손 단장은 온누리교회에 연락해 자신이 챔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장애아들을 데리고 음악을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모집이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일, 좌충우돌이 없을 리 없었다.
“교회에서 장애아들을 모으는데, 하용주 목사님이 정서장애아, 학습장애아, 지체장애아 모두 지원하라고 했어요. 저는 신체장애만 생각했지 지적장애까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풀타임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죠.”
울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첫 일 년
장애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타악기와 관악기를 다루는 곳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극도의 섬세함이 필요한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의 현악기를 다루는 곳은 없는 상태였다. 참고할 사례가 없으니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은 다섯 명으로 시작했죠. 첫 일 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모이기만 한 정도였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경험이 전혀 없었고, 자폐 증세도 잘 모르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장애 등급이나 유형 같은 개념도 전혀 몰랐고. 부모님들의 요구도 부담됐어요. 눈도 못 마주치는 첫 일 년은 차에서 울고 그랬어요.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그러나 선한 의지로 시작한 일, 망하라는 법은 없었나보다. 막상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든 된 것이다.
“연주회 섭외를 받고 그걸 위해 연습을 하게 되니 목표가 생기면서 어느 정도 정비가 됐어요. 첫 연주회는 완전 눈물바다였죠. 첫 연주회 후 새로운 섭외를 받고, 사례비도 받게 됐어요. 지금은 사례비가 엄청 많아졌어요.”
현재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는 봉사하는 선생님 40명, 단원은 현재 60여 명에 이르는 큰 규모로 성장했다. 물론 성장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송에 나가고 언론을 타면서 막무가내로 내 아이도 가르쳐 달라고 오는 부모도 있었지만, 연주보다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며 안 나오는 학생도 있었고, 악기 연주가 성향에 안 맞는다며 그만둔 아이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차차 정리된 거죠.”
부끄럽지만 사랑 챔버와 함께 성장하다
생전 처음 만나는 특별한 아이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들로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성장은 손 단장 개인의 성장이기도 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 중에 아이들에게 전수할 게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아이들이 이탈리아어를 알 리가 없으니 연주할 때 힘을 빼라는 말도 못하고 ‘원숭이 팔’, ‘애기 팔’ 이렇게 유치원 아이 가르치듯이 해야 했죠.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손 모양을 개발해서 가르쳐줬어요. 그래도 멜로디를 알고 박자 감각이 있으면 배우기 시작해서 첼로를 연주할 때까지 십 년 걸린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도 기다렸던 거죠.”
가능성이 보이면 시간이 오래 걸려도 기다려준다는 것이야말로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강점이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어린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제일 나이 많은 아이는 1977년생이다.
“창단 멤버 5명 중 한 명은 첼로, 한 명은 클라리넷을 대학교에서 전공하게 됐어요. 그런데 저한테 보람은 그런 큰 사건들이 아니고 뭔가 안 통했던 거 같은데 통하는 그런 순간들이에요. 벽이 있었는데 교감이 되는 그 순간. 그리고 우리는 숙제를 카톡으로 해요. 물론 어머니가 도와줘야 하죠. 악기를 연주한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면 아이들이 그걸 보면서 자신의 연주를 점검하고 연습을 하죠. 스마트폰 기술이 저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다음 연습에 모이면 소리가 달라진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제가 투자한 만큼 아이들이 따라온 거죠. 그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음악만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면서 삶을 배우게 됐다.
“아이들이 변화된 것을 보는 것도 기쁘지만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 기쁨으로 돌아오더군요. 단원 중 자폐아가 70~80%예요. 심한 애들은 정말 이유 없이 깨물고 소리 지르고 해요. 어머니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아이들이 있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눈도 안 마주치고 앉아 있다가 뛰쳐나가고.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피아노 전주만 나와도 악기를 잡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요. 본인들이 보람을 느끼는 거죠. 서로 챙겨주는 모습도 발견되고. 그건 이 아이들이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성이죠.”
“우리의 목적은 공동체”
요즘 손 단장은 과거와는 조금 다르게 오케스트라를 운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잘하는 애들이 있으면 못하는 애들도 있기 때문에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덜 줬어요. 아무래도 아래쪽으로 더 치우친 방향성이었죠. 지금은 아이들의 실력을 나눠서 잘하는 아이는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보다 못한 애들은 못한 애들을 위한 클래스가 있고요. 현악을 하는 아이들은 소규모 실내악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따로 가르치고 있어요.”
일반인도 다루기 어려운 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장애인이 다룰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뮤직 테라피라고도 하죠. 여기에 오는 아이들의 95%는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 어떤 때는 엄마는 귀찮아하는데 아이가 ‘사랑 챔버 사랑 챔버’ 노래를 불러서 끌려오는 경우도 있고(웃음). 여기 오면 너무 즐거워하는 학생도 있고.”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목표는 공동체다. 더 뭉쳐야 한다는 게 손 단장의 생각이다.
“그동안 큰 공연도 해왔지만 일단은 큰 연주가 있으면 저희가 뭉쳐지거든요. 아이들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부분이고. 연주하는 모습을 녹화해서 올리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때로는 부모님도 배워오는데 그것도 큰 자극이 되거든요.”
손 단장은 사랑 챔버 단원들을 위한 바람도 덧붙였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의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 또한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함께 살 공동체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었지만 저에게 할 일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잘 쓰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어요.”
카네기홀보다는 북한에서 공연하고파
손 단장은 과거를 돌아보며, 주어진 삶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콩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게 되고, 좋은 학교를 나오고,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제가 계획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을 뿐이죠. 개인적인 목표요? 개인적으론 없어요(웃음). 지금 하는 일이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그러나 주어진 삶을 산다는 것이 무조건 수동적으로 사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명이 주어졌을 때는 ‘왜 시키셨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저를 시켜주셔서 감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거죠. 제가 한 가지 맡겨진 일이 있으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긴 해요(웃음).”
그 말대로, 손 단장은 사명감만으로 시작한 오케스트라를 지금의 준프로급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그녀가 말하는 끝장을 보는 마음가짐 덕분이었을 것이다.
손 단장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다른 사람 돌보는 일을 시키려고 나를 이렇게 만드신 거구나’라고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단다. 두 아이 엄마로서 대학 강의에 봉사활동까지 하느라 바쁜데 최근에는 음반도 내놨다. 손 단장이 바이올린, 배일환 교수는 첼로, 이민정 교수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녀는 예일대 음대 재학 중인 1992년 이후부터 탄탄하게 연주 실력을 쌓아 실내악계에서 기량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챔버 같은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카네기홀을 대여하고 언론을 타려고 노력하는데, 저희는 시작부터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길이 열리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거죠. 얼마 전에는 북한 장애인 오케스트라와 함께할 기회도 있었는데 핵실험 때문에 무산됐죠. 사실 저희 목표는 카네기홀보다는 북한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