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야학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들판을 지나서 가다 보면 5월의 훈풍이 필자의 볼을 간지럽혔고 넓은 들판의 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보리밭 한가운데서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려왔다 까불대며 명랑하게 지저귀었고, 멀리서 구슬프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는 필자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 소리 듣기를 너무 좋아했던 필자는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여 한참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떼곤 했다.
논둑길 옆에는 씀바귀와 냉이의 작고 하얀 꽃이 무리 져서 피어 있었다. 토끼풀의 소담스런 하얀 꽃도 귀여운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토끼풀 꽃을 줄기째 따서 꽃반지를 만들어 끼우기도 하며 학교 가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가장 위대한 스승, 자연은 필자가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줬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직 어린 시절의 딸애가 그림을 그리며 동생의 눈은 커다란 쌍꺼풀에 왕방울만하게 그리면서 엄마 눈을 그릴 때는 왜 그렇게도 인색한지 볼펜으로 점만 한 번‘콕’찍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대개는 눈이 큰 사람들이 겁이 많다는데 필자는 작은 눈인데도 겁이 많았다. 일단 도착하면 집보다도 더 포근하고 정다운 야학교였지만 사방이 어둑해질 때는 숲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 질색이었다. 그래서 매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세상의 온갖 유령과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필자를 괴롭힐 것 같았다.
‘아유 무서워, 언제 다 가지…’
부지런히 걸어도 야학교 가는 길은 매번 까마득했다. 초긴장이 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무서운 상상을 떨쳐버리려 애를 쓰며 급히 걸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서 사람이 ‘쓰윽’ 나타났다. 순간 너무 놀랐던 필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황급히 필자를 붙잡으며 “애란아, 나야 나. 괜찮니? 응? 괜찮아?” 하며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고 보니 선배인 옥희 언니였다. 필자가 오는 것을 본 언니가 슬그머니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얼굴이 하얘지며 쓰러지려고 해서 오히려 언니가 더 놀라며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한 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금방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산길을 마구 달려가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 기억나니?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을 켜놓았었지.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놓고….”
최근에 야학교 모임에서 만난 민자 언니의 회상이다.
그랬다. 야학교는 이래저래 뛰어서 가야만 했다. 무서워서 또 빨리 공부가 하고 싶어서(공부에 신물이 난 지금 애들에게 상상이 되는 얘길까?)였다. 그리고 빨리 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더 있었다.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미국 민요 ‘산골짝의 등불’의 가사인데 농대 연습림 끝자락에 있었던 서둔야학교는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그 가사 그대로였다. 저 멀리 아련히 등잔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있으면 필자 가슴에 뽀얀 봄 안개 같은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선생님들이 미리 호롱불을 밝혀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가방이 없어 넓은 소창보자기에 책과 연필 몇 자루 담긴 필통을 넣고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던 필자는 야학교에 갈 때마다 뛰었다. 선생님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어제도 만났고 조금 후면 보게 될 분들인데도 그새를 못 참고 마음이 그렇게 급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허리춤에서는 연필들이 아프다고 ‘달그락달그락’ 소리쳤다.
훗날 알고 보니 필자만 선생님들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우리들이 너무 보고 싶어 방학기간에는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