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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처럼 살자

기사입력 2016-11-24 11:33

도시생활만 해온 사람이 무모하다 싶게 은퇴지를 결정했다. 은퇴지가 제주도라서 무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제주도에도 택지로 조성된 터가 많고 도시적인 주거 조건에 맞는 집들이 많다. 꼭 제주도에서 집을 신축할 필요도 없고 집터가 임야일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 생각 없이 빈터를 매입했고 그 빈터는 임야였다. 억새와 잡풀은 나무라 할 만큼 키가 웃자라 있었고 덩굴식물들이 엉겨 붙어 있어 걸으면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푹푹 들어갔다.

우선 나무라도 심어야겠다고 마음먹고부터 굴삭기 기사를 불렀다. 토목에는 전혀 안목이 없고 땅을 어떻게 고르는지도 몰라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공사를 해나가기로 했다. 우연히 소개로 만난 굴삭기 기사는 성격이 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에게 자기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거나 자기 아이디어대로 일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 필자가 요구하면 큰 무리가 없는 한 필자 원하는 대로 일을 해주어 고마웠다. 그 인연이 20년이 훌쩍 뛰어넘었고 이제는 매해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며칠 전에도 굴삭기 작업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바보처럼 살자는 굴삭기 기사와 함께했다. 이전에 땅을 고른 후 판판한 터에 깡마른 나뭇가지 같은 향나무, 단풍나무, 애기동백나무, 은목서 같은 정원수 묘목을 심었다. 이놈들이 제법 자라 빽빽하여 답답해 보였다. 저들도 공기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그보다는 정원수라는 관념 때문인지 밭의 다른 농작물이나 땅꼬마 화초들 같지 않게 군거하니 오히려 주위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잘난 사람이 노숙자로 전락한 모양새라 그들에게 어울릴 법한 자리로 이식을 했다. 필자 집에서 지대가 좀 높은 위치의 공터로 나무를 이식하면서 굴삭기 기사는 다른 기사들 같으면 담배 한 대 피우고 잠시 휴식할 시간에 멋들어진 노래 한 가락을 뽑는다. 애기동백을 옮길 때는 동백아가씨가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굴삭기 기사는 오래전에 취미생활을 즐기는 멋쟁이로 제주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가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해변 외딴 집에 드럼 세트를 구비하고 드럼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그 무렵 밤낚시를 즐긴다기에 초대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느 날 집으로 오라 했다. 집에 가서 보니 창고로 사용하는 해변의 외딴 집은 사람이 생활하는 흔적은 없으나 그런 대로 큰 생활 터전이었다. 그런데 그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필자 눈에 들어온, 힘찬 휘호로 쓴 한글 액자가 보였다. 내용은 ‘바보처럼 살자’였다.

처음 일을 맡기려고 전화로 거래를 틀 때다. 너무 쉽게 이쪽에서 하자는 대로 ‘그러라고 그러자고’ 쉽게 동의하기에 필자는 ‘내가 도인을 만났나? 혹 뻥은 아닐까?’ 했다 사실은 가격도 필자가 깎는 대로 그대로 응해주었다. 고맙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했다. 일 시작하면서 보기 드문 사람임을 금방 알아챘다. 생활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말없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같이 일하는 기회가 거듭되면서 신뢰도 생기고 친밀감도 쌓였다. 평소의 생활 태도와 속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집 방문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다른 동업자에 비하여 적은 값으로 일을 해주는 그와 일을 하려면 적어도 두어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늘 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혹 너무 오래 기다렸다 싶으면 쉬는 날 하루를 억지로 내어 필자 집에 온다. 얼굴에서 피로함이 느껴지면 “급하지 않으니 다음에 해도 되는데…”라고 말한다. 참 반가운 소식은 요지의 상가에 4층 빌딩을 올렸단다. ‘바보처럼 살자’의 힘찬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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