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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서 느릿느릿 떠나는 '청송 심씨 고택'

기사입력 2015-07-07 14:25

큰집 ‘송소’ 작은집 ‘송정’ 고택 탐방기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위치한 청송 심씨의 송소고택(이태인 기자 teinny@)

도시의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빠르고 지나는 차들도 빠르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추월해가는 사람을 붙들고 “뭐가 그리 바쁘세요?”라고 물으면 “무엇이든 빠르게 일하고, 빠르게 말하는 것이 도시에서의 예의범절이라우”라는 젊은이들의 차가운 훈계가 대답으로 돌아온다. 숨 막히는 도심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만석꾼 청송 심씨 고택은 느릿느릿 걸어가려고 길손을 여유롭게 맞아주는 곳이다.

임도현 프리랜서 veritas11@empas.com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덕천마을을 지키고 있는 청송 심씨의 송소고택. 거창하게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으뜸가는 만석꾼인 청송 심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세도가로 이름을 날렸다는 청송 심씨. 누대의 세도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다. ‘삐거덕’ 하고 조심스럽게 솟을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길손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삽살개 검둥이다.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어미만한 풍채로 엉금엉금 걸어와 꼬리를 흔들며 길손을 반기는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것 같다. 저만치서 인기척을 듣고 찰방공파 11대손이자 송소고택의 주인장 심재오 씨가 마중을 나온다.

“주말에 주왕산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 올 10월까지는 주말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하지만 주중에는 한산하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 받지 않은 자영업이나 전문직 손님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시거나 혼자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로 가득 차 왁자지껄한 고택의 모습은 왠지 상상하기 싫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애써 찾아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고 싶은 여행객들이라면 반드시 주말을 피해 이곳을 찾는 것이 좋다. 손님 하나 없는 넓은 고택에서 주인 행세도 해보고 귀여운 검둥이의 애교를 혼자서 독차지하려면 한산한 주중이 제격이다.

▲청송 심씨의 송소고택 내부 모습.(이태인 기자 teinny@)


심 씨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고?

“고을의 부자는 대개 천석꾼입니다. 옛날 청송 심씨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황해도와 개성까지 전부 청송 심씨 땅이었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심 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죠.”

집안의 위세를 설명하는 심재오 선생의 어조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옛날 경주의 최부자는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원칙을 세우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으니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청송 심씨 역시 최부잣집에 밀리지 않는다.

“일제시대 의병 군자금이 죄다 청송 심씨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놓고 군자금을 줬다간 총독부로부터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 음성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가문은 송호택 증조부님께서 국채보상운동 청송지부장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시면서 일정시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래된 집, 오래된 탁자, 오래된 문갑. 송소고택이 박물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과 손님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저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던 길손을 송소고택 곳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운이 옛날로 끌고 들어간다.

“송소고택은 만석꾼 심처대 할아버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재산이 불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본래 선대가 터를 잡고 있던 지금의 성주봉 아래 덕천마을로 되돌아와 더 큰 집을 짓고 사신 거죠. 아들 넷을 둔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는 맏이네 99칸의 송소고택을 짓는 데 13년, 나머지 세 아들에게 각각 30칸 규모의 집 세 채를 짓는 데 7년이 걸렸어요. 여기에 첩의 아들이 분가해 살 수 있도록 25칸의 집을 짓기까지 모두 21년 동안 214칸의 집을 지어 물려주셨지요.”

송소고택은 4형제의 집 모두 대문채, 큰사랑채, 작은 사랑채, 인채, 별당과 조경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대궐이었다. 하지만 전란과 정치적 소요를 겪으며 송소고택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이 안타깝게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수백 년 전 선조들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투영된 전통가옥이기에 여관이나 모텔과 달리 불편한 점이 바로 화장실이다.

“전립선이나 요실금으로 고생하시는 중장년층 손님들을 위해 재미삼아 사용해보시라고 요강을 드려요. 송소고택을 찾아오시는 중·장년층은 평소 전통가옥에 관심이 있는경우 재래식 화장실 같은 불편함을 감수하시는 반면, 아무런 정보 없이 재미삼아 들르신 분들은 밤을 버티지 못하고 퇴실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저희 집이 체통을 심히 따지는 종택은 아니지만 나름 전통을 지닌 가옥이에요.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오시기 전 사료를 찾아 공부를 한 후 송소고택을 찾아주시면 한옥에서 하룻밤 묵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실 수 있습니다.”


▲1.송소고택 별당(별채). 2.행랑채에 앉아 있으면 시원스레 펼쳐진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다. 3.고택의 맨 뒤인 후원에서부터 대문까지 내다보인다. 4.약 100년 된 화조도로 만든 병풍이 있는 객실. 5.큰 방은 8명까지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다. 6.송정고택의 아기자기한 마당은 탐방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식공간이다. 7.송정고택의 심증옥 여사와 남편 정진철 씨는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손님을 반긴다. 8.전통양식을 그대로 보존한 정원에선 단아함과 여유로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이태인 기자 teinny@)

새색시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송정고택

송소고택 주인장의 당부에 이곳을 찾아갈까, 말까 고민이 든다면 독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송정고택이다. 송소고택과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쪽문을 통해 왕래할 수 있는 송정고택은 심호택 선생이 차남 심상광 선생에게 지어준 것으로 현재 심재오 선생의 육촌 여동생 심증옥 여사와 남편 정진철씨 부부가 기거하며 손님들을 맞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결혼해 분가를 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4년 전에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와 은퇴생활을 하고 있어요. 거의 40년 동안 집이 비워져 있었던 터라 손볼 곳이 많았는데 말끔히 수리를 해서 예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어요.”

방 한쪽 벽면에는 의친왕의 친필이 새겨진 현판이 눈에 띈다. 마루 한편에 펴놓은 좌식상은 500년 된 나무로 만들었으며, 집 곳곳을 지키고 있는 두꺼비상은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더 이상 채굴이 금지된 귀한 꽃돌로 만들어졌다. 객실 벽면에 세워져 있는 화조도 병풍은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며, 재떨이와 곰방대 꽃병 등 선친들이 사용했을 법한 물건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주인장 부부가 도둑 걱정에 잠을 편히 잘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정고택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며칠 집을 비우느라 문을 잠가놓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곧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퇴 후 살 곳을 찾기 위해 춘천, 영월, 안성 등 전국을 돌아다녀봤지만 청송만큼 여유롭고 인심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혼자 여행하시는 저희 또래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여기 집을 내놓은 곳이 있나요?’ 하고 매번 물으실 정도니 처음 찾은 분들의 소감이 이곳에 정착해 사는 저희들의 느낌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혼자서 찾아온 여행길, 손님을 맞는 부부의 즐거운 모습에 울적했던 마음은 이내 사그라든다. 십수 년간 켜켜이 묵은 때마냥 쌓인 도시생활의 염증을 이곳에서 단번에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든지 혼자서 느릿느릿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알게 됐으니 행복의 단서 하나만은 제대로 주머니에 챙겨온 듯하다.

▲'청송 심씨 고택'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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