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형, 지금 시작해도 충분하다

“평생 집안일만 했는데,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지금까지 임금노동이나 조직 생활을 거의 경험하지 않은 사람, 10~20년의 경력 단절로 사실상 처음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같은 문턱 앞에 선다. 채용 정보를 찾고 이력서를 쓰는 일부터 출퇴근, 업무 지시, 동료 관계까지 낯설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를 내라’는 말보다 부담을 낮춘 진입 경로다.

통계 밖에 섞여 있는 ‘첫 취업’, ‘경력 단절’
생산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삶의 경험이 풍부한 고령자는 중요한 국가 자원이다. 박경하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고령자를 단순한 돌봄이나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지혜와 숙련을 갖춘 사회적 자원으로 재인식해야 한다”며 “이들에게 일자리 참여는 경제적 소득을 넘어 자존감과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다만 경력이 풍부한 은퇴자와 생애 첫 취업자에게 같은 일자리와 교육을 권할 수는 없다. 출발선이 다른 만큼 준비 과정도 달라야 한다.
노년층 자료에서는 이 문제의 윤곽이 조금 더 선명하다. 2025년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실태조사(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 참여자와 대기자 가운데 생애 주된 일자리 경험이 없는 사람은 20.1%였다. 여성은 26.7%, 남성은 7.8%였다. 조사 결과는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거나 대기 중인 여성 중 장기간 이어온 생애 주된 일자리가 없었던 비율이 남성보다 크게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은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여성 고용 정책에서는 임금노동 경험이 없는 중장년 여성도 “경력 단절 여성 범주에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직장을 그만둔 사람과 조직 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같은 정책 범주에 섞여 있는 셈이다.
이들에게 첫 문턱은 기술보다 심리일 수 있다. 오 연구위원은 이들이 원하는 직업을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연령 제한과 차별 때문으로 인식하며, 일자리 정보 부족과 자신감 부족도 주요 장벽으로 꼽는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위원도 “오랫동안 일을 쉬었거나 직업 경험이 부족한 고령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어려움은 심리적 부담”이라고 했다. 단순 노무 중심 일자리에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살리지 못한다고 느낀다. 역량형·민간형 일자리에서는 디지털 기기와 자격증, 관련 경력이 장벽이 된다. 자신감 부족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집안일과 돌봄을 직무 언어로 바꾸는 법
긴 세월 살아온 시니어에게 “해본 일이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전업주부와 가족 돌봄자는 가족을 위해 일정 관리, 재고관리, 조리, 의사소통, 위기 대응 등의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다. 박 연구위원은 “가사 관리 경험은 정리 수납, 반찬 제조·판매, 공유 부엌 운영 같은 직무로 연결할 수 있고, 양육과 간병 경험은 정서적 공감 능력과 따뜻한 의사소통 역량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 봉사 경험은 주민 관계망, 취약계층 발굴, 모니터링 능력으로 풀 수 있다. 카카오톡·밴드로 정보를 공유하고 키오스크와 QR코드를 사용한 경험도 디지털 역량이다.
중요한 것은 ‘남들처럼 집안일을 했다’고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다. 병원 예약과 복약을 관리했다면 일정 관리·기록·책임성으로, 가족 식사를 맡았다면 식품위생·재고관리·조리 계획으로, 주민 모임을 운영했다면 행사 운영·관계 조정으로 나눠 적어야 한다. 박 연구위원은 “특정한 전문 기술이 없더라도 의사소통 능력, 대인관계 능력,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신체 활동 능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생활 경험을 다시 여성의 저임금 돌봄노동 일자리로만 연결해서는 곤란하다. 오 연구위원은 가사·육아·돌봄 경험을 살리기 쉬운 사회복지·돌봄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해당 경험을 이유로 이 분야만 권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무급 가사·돌봄 경험을 공식 경력으로 인정할 새로운 경력 형성 지원 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생활 경험은 직무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여성에게 돌봄 직종만 권하는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자격증보다 상담, 작은 경험부터 차근차근
오 연구위원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충분한 상담과 진단을 거쳐 자원봉사 또는 단기 교육, 일 경험, 시간제 일자리 순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이상적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처음부터 장기 자격증 과정에 등록하기보다 내가 어떤 업무와 환경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다. 그는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찾아가 개별 상담과 집단 상담을 받을 것”을 첫 행동으로 권했다. 다만 “전국 159개 여성새로일하기센터가 중앙정부의 교육 틀에 머물지 않고 지역 산업 특성에 맞는 일자리를 발굴해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60세 이후에는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박 연구위원은 첫걸음형의 경로를 두 갈래로 제시했다. 업무 난도와 활동 부담이 비교적 낮은 공익 활동으로 사회생활의 리듬을 익힌 뒤, 교육을 거쳐 노인역량활용사업으로 이동하는 공공형 경로가 하나다. 민간 취업을 희망하지만 자신감이 부족하다면 약 3개월 동안 기업과 참여자가 직무 적합성과 조직 적응 가능성을 확인하는 현장실습 훈련 지원사업을 활용할 수 있다.
2024년 현장실습 훈련 지원사업 참여 완료자 6만 6126명 가운데 5만 7587명이 계속 고용돼 계속고용률은 87.1%였다. 다만 누적 참여자 중 여성은 30.5%에 그쳐, 중장년·노년 여성에게 이 경로가 충분히 열려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사업별 조건은 다르다. 공익 활동은 만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자 등이 대상이라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노인역량활용사업은 교육·상담·돌봄·안전 모니터링처럼 일정한 역량을 요구하지만, 박 연구위원은 “희망 직무가 기존 경력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교육을 이수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참여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체사업단은 조리·제조·운전 등 기술과 협업 능력, 비교적 높은 활동 강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알맞다. 취업지원사업은 과거 직장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해 민간 시장에 재진입하려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준비 정도와 목표에 따라 한 단계씩 옮겨가는 접근이 필요하다.
박 연구위원은 앞으로 노인 일자리도 이중 구조로 세분화해야 한다고 봤다. 고학력·고숙련 신노년층에는 ‘노인역량활동사업’과 ‘취업 알선형’ 선택지를 넓히고, 75세 이상 후기 고령층에는 ‘저강도·안전 중심의 활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취업보다 중요한 것은 오래 일할 조건
첫 일자리를 임금과 직종만 보고 고르면 오래가기 어렵다. 오 연구위원은 “중장년 여성에게는 이동 거리, 유연근무제, 일·가정 양립 조건이 남성과 다른 주요 기준”이라고 말했다. 직장 안에 멘토·멘티 관계를 설정해 초기 적응을 돕는 것도 고용 유지에 효과적이라고 봤다.
박 연구위원은 “건강과 체력을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행 기관 실무자에게 노인역량활용사업 참여자의 필요 역량 3가지를 고르게 한 조사에서 ‘신체적 건강’이 74.5%로 가장 높았다. 참여자와 대기자 조사에서도 65.1%가 일자리 배치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로 건강·체력을 선택했다.
2024년 노인공익활동사업·노인역량활용사업·공동체사업단 누적 참여자 98만 2789명 가운데 11만 8369명, 약 12%가 중도 포기했다. 중도 포기자 가운데 건강 악화를 이유로 든 사람은 5만 7841명으로 48.9%였다. 하루 활동 시간, 이동 방식, 서서 일하는 시간, 들어야 할 무게, 안전교육 여부를 시작 전에 확인해야 한다.
조직 적응도 준비가 필요하다. 오랜 조직 경험이 있는 일부 참여자는 과거의 직위와 업무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시 체계와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박 연구위원은 “젊은 세대와 협력하는 방법, 업무 지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 기본적인 직장 예절을 익힌 뒤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는 직무 기술과 디지털 기기를 반복해 연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행 기관과 기업에도 첫 참여자를 기다려주는 교육과 안전관리 책임이 있다.
생애 첫 취업이든 수십 년 만의 복귀든 단번에 좋은 일자리를 얻을 필요는 없다. 상담을 예약하고, 지금까지 해온 일을 행동 단위로 적고, 단기 교육·자원봉사·일 경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첫걸음의 목표는 ‘취업 성공’ 하나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의 강도와 시간, 관계 방식을 알아가는 것이다. 처음과 다름없는 취업일수록 천천히 들어가는 경로가 필요하다.
도움말 박경하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박경하 선임연구위원은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중고령자의 은퇴 과정 유형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복지 정책과 고령자 고용정책을 연구하며, ‘분배의 재구성 :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를 공역하고 ‘일하는 노년, 활기찬 공동체’를 공동 집필했다.
오은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고용연구본부 선임 연구위원
오은진 선임연구위원은 산업교육학 박사다. 여성 경제활동, 직업교육, 경력 단절 예방과 취업 지원 정책을 연구해왔다. 2019년부터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2023년부터 고용노동부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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