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식 한국디자인고령센터 대표 “시니어 산업 생태계 위한 공모전 필요”

복지용구나 고령친화 제품 등 노인을 위한 제품은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국민건강보험이나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정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가격 내에서 제작해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디자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제조사들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디자인부터 손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최명식 한국디자인고령센터 대표다. 그는 디자인 교육, 정책, 산업 실무를 아우르며, 정년 후에는 다시 '고령사회'라는 새로운 과제를 향해 뛰어들었다.
최명식 교수는 중앙대를 졸업 후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취득했다. LG전자와 중국 하이얼, 하이센스, TCL 등 글로벌 제조업체의 디자인 자문으로 활약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디자인정책학회 회장, 한국디자인정책개발원 이사장, 산업통상자원부 우수디자인(GD)상품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말 그대로 디자인계에서 '정점'으로 불리는 자리들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고령자 위한 디자인? 이젠 고령자와 디자인할 때”
“그동안 상품 디자인은 많이 했지만, 정작 내가 속한 세대의 디자인은 놓치고 있었다는 걸 책을 쓰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시니어 세대 위한 디자인, 우리가 살아갈 시대를 위한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서 ‘디자인의 길’을 통해 '창의·혁신·윤리'라는 디자인 삼위일체 철학을 제시했다. 그 철학은 곧 고령자 디자인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고령자 디자인을 제대로 이뤄내려면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령자는 단지 소비의 대상이 아닙니다. 삶의 주체입니다. 살아 있는 디자인은 당사자의 목소리에서 나옵니다. 사용자만 보는 게 아니라 보호자, 돌보는 사람, 전체가 함께 쓰는 시스템을 디자인해야 돼요. 예를 들어 요양보호사와 고령자 간의 인터랙션, 그런 사용자의 흐름까지 같이 디자인해야 하죠. 제품이든 서비스든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2022년 한국디자인고령센터를 설립했다.
그는 고령자복지 제품들이 ‘배려 없는 디자인’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한다. “왜 지팡이는 늘 창피한 디자인인가, 왜 보행기는 이렇게 무겁고 못생겼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배려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령 디자인은 복지의 끝이 아니라 산업의 시작’이라며, 디자인의 개입을 통한 복지산업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디자인이 빠지면 산업화는 어렵습니다. 디자인이 들어가야 브랜드가 되고, 경쟁력이 생깁니다. 고령자용 제품도 마찬가지예요.”

“고령자용 제품 세계화되려면 정부부터 바뀌어야”
최 대표는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에이지 테크’ 산업이 수출 전략 산업이 되려면 정부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3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고령친화 기술의 해외 진출 확대를 위한 금융지원 방안을 공식화했다.
“한국 제품들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제품 수출을 많이 하고 있지만, 고령자용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디자인을 강화해야 합니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세계에서 인정받는데, 유독 고령자용 제품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가지를 제안했다. 먼저 보건복지부 내에 고령 디자인 담당 부서 신설을 말했다. 산자부의 엔지니어링디자인과와 유사한 기능의 부서다. 또 고령친화우수제품의 선정 과정에서 디자인 항목이 신설되고, 심사위원에 디자이너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고령자 제품 생산 기업에 대한 디자인 컨설팅 지원도 지적했다. 타 부처에 비해 지원책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디자인 공모전에 대한 제안도 했다.
“정부부처 중 디자인 공모전이 없는 곳이 드문데 그 중 한 곳이 보건복지부에요. 산자부의 우수디자인(GD)상품과 같이 공모전을 통해 잘하는 기업을 칭찬하고, 젊은 아이디어의 상품화를 지원하는 것이죠. 이런 산·학·관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생태계가 살아나고, 우리의 제품이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시니어 노후의 격을 높이는 일”
그는 고령자용 제품들을 보며 디자인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때라고 이야기했다.
“디자인은 인간의 격을 높입니다. 사용자의 품격, 브랜드의 품격, 사회의 품격을 높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노인을 위한 제품은 더더욱 그래요. 고령자용 제품이라고 해서 격이 떨어지는 디자인이면 안 되죠. 오히려 더 멋있고 당당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 중심 디자인을 강조하며, '보이지 않는 디자인', '슬로우 디자인', '향수(鄕愁) 디자인', '롱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 등 고령자를 위한 디자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제는 직관적이고 친숙하며 오래가는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최 대표는 고령 디자인의 철학을 네 가지 원칙으로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첫째,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디자인이 연령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둘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책임 있는 디자인이어야 합니다. 셋째, 당사자인 고령자가 설계와 테스트에 직접 참여하는 ‘참여형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넷째, 제품 하나가 금방 낡고 버려지지 않도록, 직관적이고 오래 쓸 수 있는 ‘롱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 네 가지 원칙은 고령자를 위한 디자인을 넘어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영국에서 보고 배운 고령디자인의 가능성
지난 6월, 최 대표는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영국 왕립예술대학을 방문했다. 그는 특히 대학 내에 위치한 '헬렌 햄린 디자인센터', 그리고 고령자 디자인 전문기관인 '고령 디자인 연구소(Design Age Institute)'를 주목했다.
“영국은 고령자 친화적 디자인이 일상에 녹아 있습니다. 리모컨, 주방도구, 심지어 공공전화기까지도 노인을 배려한 형태와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죠.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존중의 방식이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그는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 영국이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왕립예술대학(RCA)을 국가 주도로 육성했던 것처럼, 고령사회 디자인도 국가 프로젝트로 접근해야 합니다.”
최 대표는 이들 기관이 수행하고 있는 실증 연구와 디자이너-기업 연계 프로젝트 등 협업 시스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스타트업 기업과 디자이너를 매칭해 우수한 디자인의 고령자 대상의 제품을 기획하고, 그 결과물을 투자까지 연계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놀랐습니다. 단순한 매칭을 넘어 상품화까지 완성될 수 있도록 협업 시스템을 잘 갖춰 놓았더라고요. 우리도 이러한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니어 산업 분야 기업과의 협업 원해”
최 대표는 한국디자인고령센터 설립 이후 고령자를 위한 인지기능 향상 게임부터 고령 디자인 공모전, 고령자를 위한 모듈형 욕실 디자인, 민관 협력 컨소시엄 구상 등 활발한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주도한 대표적 콘텐츠는 ‘청춘로’다. 인지기능을 향상시키는 디지털 게임으로, 손 운동, 기억력, 판단력 등을 자극하는 콘텐츠가 4단계로 구성돼 있다. 새소리 콘텐츠를 통해 청각 자극과 심리적 이완도 병행한다. 게임은 요양시설 내 '체험존' 형태로 시범 도입이 가능하며, 사용자별 점수와 경과를 기록할 수 있는 시스템도 탑재돼 있다.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데이터가 쌓이고 인지 수준이 측정되며, 사용자의 변화도 관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플랫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니어 산업의 생태계 내의 많은 기업과의 협업을 기대했다.
“시니어 산업 분야의 기업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 중심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자체적으로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합니다. 디자인 관련 고민이 있을 때 망설이지 말고 저희 센터의 문을 두드려주었으면 해요. 그간 다른 분야에서 쌓은 협업 경험을 통해 시니어 산업이 살아나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