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출간, 은퇴 후 시 작업 몰입

이희주 시인은 ‘귀환 시인’으로 불린다. 1989년 ‘문학과비평’ 가을호에 시 16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1996년 시집 ‘저녁 바다로 멀어지다’를 펴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가 나오기까지 2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공백의 이면에는 시인이 33년간 ‘증권맨’으로 살아온 현실이 있다. 시를 쓰던 손은 잠시 접고, 주가와 지표를 다루는 숫자의 세계 속에서 현실의 파고를 견뎌냈다. 은퇴한 이후 그는 ‘시인’이라는 이름 앞에 온전히 자신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
이희주 시인은 등단한 그해 12월,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한국투자신탁에 공채로 입사했다. 그리고 33년간 장기 근속했으며, 2022년 커뮤니케이션본부장 전무로 퇴임했다.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의 심장에서 일하던 그는 현재 경기도 양평에서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문인의 숨결로 하루하루를 채운다. 동시에 한국경제TV 감사로 활동 중이며, 골프를 취미로 즐긴다. WPGA 골프 티칭프로 자격증까지 보유했다. 다양한 삶의 결을 경험한 그는 “이제야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첫 시집에 ‘면접 보는 시인’이라는 시가 있는데, ‘월급 많이 준다기에 왔습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의 저는 결혼도 안 하고, 전업 작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당장 먹고살 길을 찾는 게 급선무였죠. 그래서 월급 많이 주는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처음엔 10년만 다니다 목돈을 모아 퇴사하고 전업 작가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결혼도 하고 아빠가 되면서 가장의 책임감이 생겨 ‘조금만 더 하자’며 다니게 되었고, 어느덧 33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늘 마음 한켠에는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했습니다.”
시는 곧 삶, 삶이 곧 시
문학평론가 임지훈은 시집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를 두고 “도시의 밤을 수놓은 혼자만의 불빛과 반짝이는 술잔들을 닮았다”고 평한 바 있다. 총 4부, 6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주로 외롭고 쓸쓸한 현대인의 모습을 담았다. 시인의 언어는 편안하고 어렵지 않지만, 시가 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시는 삶의 깊은 곳을 관통하며, 독자들에게 공감과 여운을 남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타자들에게 소외되고 고립된, 한마디로 이제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제 시는 그런 사람들의 척박한 가슴에 작은 불씨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삶에 지쳐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더불어 제 시가 공감을 일으킴으로써 독자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헤쳐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약자들을 주제로 시를 씁니다. 바닥에 대하여, 종점에 대하여, 퇴직에 대하여, 노인에 대하여, 하류에 대하여, 슬픔과 외로움에 대하여 쓰고 있지요.”
은퇴하고 이듬해 출간된 시집에는 이희주 시인의 27년의 시간과 기억이 농축돼 있다. 그는 “시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라며 “시에는 현재 나의 삶이 투영된다. 아무래도 회사 생활 할 때는 조직 내 관계, 그리고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았다”고 말했다.
“‘전어나 우리나’라는 시는 언젠가는 잘려나갈 샐러리맨의 애환을 전어에 빗대 표현한 것이죠. 이처럼 제 시에는 직접 현장에서 겪은 직장인의 애환, 고충 등이 담겨 있어요. 제가 부장, 상무, 전무 등 직책으로 불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기업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 그런 시를 쓰고 발표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퇴직 후에야 비로소 그 시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이 ‘부캐’가 아닌 ‘본캐’로 살고 싶었던 그에게 은퇴 소감을 묻자 “마음이 굉장히 후련하고 편안했다. 해방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적막함과 헛헛한 마음도 따라왔다. 그 감정은 시 ‘침묵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옷장에 양복이 걸려 있다/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바빴던 주인 따라 덩달아 바빴던 형식들/ 그 속에 몸담고 살아왔던 세월들’
“저는 일생의 대부분, 청춘과 중장년의 시간을 바쳐 한 직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60세가 넘자 자연스레 아웃되더군요. 어찌 보면 나이라는 허상 때문에 용도 폐기된 셈입니다. 주변에서 은퇴 후 우울해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조직에 충성했는데 잘렸다는 배신감보다도, 사회에서 점점 밀려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서글퍼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벌써 황혼의 나이가 되었구나, 그런 것 때문이죠. 그러나 은퇴는 종점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점
- 이희주
나는 주로
변두리에서 살았다
흐린 외투 하나 걸친 바람
민들레 꽃씨 후후 불며 서성이던 곳
사람들은 그곳을 종점이라고 불렀으나
나에겐 그곳이 곧 출발점이었다
이별도 만남도
다 같은 것이었다
밤차를 타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떠나는
종점은 내겐 늘 새로운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눈물도 같은 것이었다
- 시집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시인동네, 2023)

따뜻한 등불이 되다
이희주 시인은 자신의 두 권의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은 결국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고 표현하며, 시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는 사람들 마음속에 걸려 있는 따뜻한 등불”이라고 정의 내렸다.
“외로움, 쓸쓸함은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독자로부터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작가님의 시집을 읽고 많은 위로가 됐다’는 메일을 받았어요. 저는 ‘거기에 너무 얽매이면 더 외롭고 힘들어지니까 받아들이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보자’고 답했습니다. 그때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저 그런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지점이 관통한 셈이죠.”
세 번째 시집의 공백은 짧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어떤 얘기가 담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시, 그리고 직장인의 굴레를 벗어난 이희주 시인은 “더욱 따뜻하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길 것 같다”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시를 쓰고 있다”며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 중이라고 밝혔다.
“저는 1962년 충남 보령 대천 바닷가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살았습니다. 서정주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는데요. 제가 오늘날 시를 쓰게 된 배경 또는 자양분의 8할은 고향 보령의 해 지는 저녁, 노을 진 서해 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제 정서 속에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고, 시 역시 밝고 화려하기보다는 노을 진 바다와 같이 차분하고 쓸쓸하고 슬픔의 정서가 배어 있죠. 저녁노을은 하루를 마감하는 풍경이고, 다시 아침을 기다리는 희망의 정서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그는 직장 생활로 미뤄왔던 자전적 성장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많은 시니어들이 시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며 시 창작, 글쓰기 등 재능기부 강의도 준비하고 있다. 이희주 시인은 “사실은 누구나 시인이다. 그간 시를 안 썼을 뿐”이라며 독자들에게 독려의 메시지를 남겼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있어요. 시에 문외한이었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칠레의 민중 시인 네루다와 인연을 맺으면서 시를 알게 되고, 시인으로 성장합니다. 시니어들에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 시란 시인을 포함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시를 알고자 한다면, 시 읽기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문학은 농사처럼 사람들 마음의 땅에 언어라는 씨앗을 뿌려 푸른 식물을 키워내는 일과 같습니다. 시를 많이 접하다 보면 가슴이 푸르러지며,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세상과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일상 화법과는 다른 시적 화법을 접하면서 세상을 더 깊이,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美)라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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