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

죽음이 우리 사랑을 갈라놓았을지라도…

기사입력 2023-05-30 08:22

[브라보 마이 러브] 동정과 연민에 환자에게 사랑을 느낀 간병인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하는 것이 사람이라지? 죽음 앞에서라면 더더욱. 삶의 마지막에는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에 회한이 든다지 않나. 어느 책에서 읽은 대로, ‘죽을 만큼 마음껏 사랑해볼걸’, ‘조금만 더 일찍 용서할걸’, ‘걱정은 내려놓고 행복을 만끽할걸’, ‘마음을 열고 포용할걸’, ‘한 번뿐인 인생, 열정적으로 살아볼걸’, ‘아등바등 말고 여유를 가지고 살걸’,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면서 살걸’ 등 말이다.

그도 그랬을까? 지난달 죽은 그도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후회했을까?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에 솔직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을까?

오늘도 그의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수목장을 했기 때문에 반나절 공원을 산책하듯, 바람을 쐬듯 발걸음을 하게 된다. 그의 나무는 아직 어린 묘목이다. 가녀린 묘목 밑에서 다 큰 성인이 의지하여 잠자고 있다. 나무 밑에 묻혀 있다 해도 그의 육신이 곧장 나무를 키우는 자양분이 될 수는 없다. 그의 육신의 재는 나무 상자에 담겨 땅속에 있으니 그 육신이 상자와 함께 시나브로 흙이 되어 나무를 키우는 것은 멀고도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묘목 앞에 나붓이 꿇어앉아 그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모르죠? 알았다고 해도 당신과 나를 죽음이 곧장 갈라놓았을 테지만…. 이제 이렇게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당신이나마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어 나는 차라리 지금이 행복하네요.”

단 석 달을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다면 그 사랑은 너무 밑지는 장사 아닌가? 어떤 사랑이든 진실했다면 가슴에, 영혼에 아름다운 상흔을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라고들 하지만.


유부남과의 동거 6개월

나는 아내 있는 남자와 6개월을 살았다. 그 사실을 몰랐으니 속아 산 것이다. 나는 그와 결혼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나는 그의 아내로, 그는 나의 남편으로 그렇게 부부처럼 살았다. 투병 중이었으니 결혼식은 할 형편이 못 된다 해도 혼인신고라도 하자는 말조차 못 들은 척할 때 낌새를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는데야 어쩌랴. 한 1년 몸을 보양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든가 혼인신고를 하자는 남편(이 아닌 내연남)을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나. 나로서는 불안함과 서운함이 없지 않았으나, 내 곁에 그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하고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마흔 살이었던 그는 국토 남단 이름도 모를 섬에 아내와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섬과 가까운 뭍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섬에서 나고 자랐고, 섬 반경 내에서 직업을 구했고, 인근 섬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따분함,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감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사철 피어오르는 삶이었을 것이다. 눈앞이 확 열리는 뭔가가 찾아오지 않는 한, 고만고만하게 살다 고만고만하게 생을 마칠 운명이었을 그에게 숨통은 뜻밖에도 암과 함께 트였다.

그가 폐암에 걸린 것이다. 다른 암도 아니고 폐암이라니! 그것도 공기 청정한 어촌에서 폐암이라니, 그야말로 ‘운명의 암’이라 할 수밖에. 허파에 바람 들듯 병은 그를 서울로 데려왔다. ‘서울 큰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본격적인 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수술 후 나는 간병인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환자와 간병인, 환자와 간호사만큼은 아니라 해도 로맨틱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 아니 내연남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상대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사기꾼이 있으랴. 결혼 사기극을 벌이는 판에 여자 마음 홀리는 것쯤이야.

버젓이 살아 있는 아내와 딸을 3년 전 배가 뒤집히는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암에 걸린 것 같다며 내게 동정과 연민을 끌어낸 사람. 퇴원을 해도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나만 좋다면 학교를 옮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열아홉 살에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남자와 동거하다, 1년도 못 살고 헤어진 후 20년 가까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퇴원 후에도 학교를 옮기거나 다른 직장을 구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나의 단칸방이 신혼방이 되었고 나의 간병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떻게 6개월이 넘도록 그의 아내가 한 번도 병원을 오거나 그를 찾는 일이 없었을까? 아무리 먼 곳에 산다고 해도. 나중에 들으니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 병 수발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암 수술을 하는 남편을 어떻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 무렵 부부 사이에 석연치 않은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여하간 서울로 올라간 남편과 그간 전화 통화만 하다 6개월이 지나 만나고 보니 나라는 여자가 떡하니 옆에 있었으니 그 아내의 충격은 또 얼마나 컸으랴.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고백도 못 한 연인의 죽음

그 길로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아내의 치마꼬리를 잡고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암에 걸렸으니 망정이지 어떤 아내가 그런 황당한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랴. 죽었던 남편이 살아온 셈 치겠다며 크게 봐준 것 같았다. 암이 그를 두 번 살렸다.

그럼 나는? 그 여자에게 머리끄덩이 안 잡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억울하고 황당하기야 그의 아내 못지않았지만, 그 남자와 사는 동안 소소한 빚도 생겨 억지로라도 마음을 수습하고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나가야 했다.

다니던 병원에 이미 소문이 돌아 일자리를 옮길 생각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갔는데, 그 남자가 떠난 침상에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차트를 보니 52세였다. 운명의 내 사랑이, 석달 만에 나를 떠난 사랑이 그렇게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간암 환자였다. 내 눈에도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나를 본 담당 간호사가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지간하면 병원에 그냥 있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지만 전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필요한 접촉 외에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찾아오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더욱 경계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마지막 부탁’을 해왔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후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인데, 거꾸로 우리 사이는 그 일을 계기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2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구술을 내가 받아쓰는 형식의 편지였다. 신혼 때부터 삐걱대던 아내와 이혼한 후 세 살이던 딸을 혼자 키우던 어느 날,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딸을 데려갔더라고. 작정하고 데려갔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 애가 탔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엄마가 키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이 악물고 포기했다고. 하지만 양육비라도 보내주려고 간간이 수소문을 했지만 도통 불통이었고, 그는 그대로 해외 취업을 나간 사이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혼한 아내가 죽은 것은 딸을 데리고 간 지 얼마 안 돼서였고, 그 길로 딸은 해외로 입양되었다고 했다. 아빠가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라고. 그는 그대로 사정이 있었는 데다 그 모든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터라, 현재 딸과의 재회를 위해 입양기관을 통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병이 깊어지고 있어 딸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날 것에 대비해 편지를 써두고 싶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기운이 달려 몇 차례 편지를 나눠 쓰는 사이, 내 쪽에서 급격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보육원 출신인 내 처지와 그의 딸이 겹쳐졌고, 평생 외로움과 벗 삼고 살아온 나와 그가 한마음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딸에게 주는 그의 편지와 마음은 얼굴도 모르는 내 부모의 것인 것만 같아 나는 그를 통해 부성을 느꼈다. 그가 딸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절절한 그의 마음을 한자 한자 써 내려가면서 나는 그의 딸이 되어 그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지막 석 달을 나로 인해 행복했고, 나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는 결국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벌 받을 각오로 말하건대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그와 나의 사랑이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편지를 간직하고 있고, 그를 대신해 그의 딸과의 접촉을 이제 시도하려고 한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기사

이어지는 기사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

0 / 300

브라보 인기기사

  • “어른 됨은 성숙한 시민성”, 좋은 어른 꿈꾸는 청년 공동체 ‘유난’
  • 시대 연구자 3인, “어른 필요 없는 유튜브 세대 젊은 꼰대 돼”
  • 시인 나태주가 말하는 어른, “잘 마른 잎 태우면 고수운 냄새 나”
  • 5060세대 42%, “젊은 세대 존경 받고 싶어 소통 노력”

브라보 추천기사

브라보 테마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