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정원 순례]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선인이다

산청포레스트정원은 너른 터에 앉힌 정원이다. 면적이 4만 9587㎡(약 1만 5000평)에 달한다. 민간정원치고 이보다 큰 곳이 드물다. 정원의 전모를 한눈에 쓸어 담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규모 하나로 존재감을 돋우는 정원은 아니다. 깊은 맛이랄까, 다분히 야생적인 정취랄까, 여느 정원에서 쉽사리 느낄 수 없는 원초적이고 그윽한 심미감을 자아내 뇌리에 새겨지는 곳이다.
정원 스케일이 너무 크면 경관의 균형과 조화에 차질이 생겨 헐겁게 다가올 수 있다. 가령 조경 작업 끝에 어쩔 수 없이 귀결된 여백이 지나치게 휑하면 스산할 수밖에. 그러나 이 정원은 너른 터에 다종다양한 수목을 적절하게 채워 공백을 타파한 대신 여백의 묘는 살렸다. 특징은 더 있다. 인위적 치장을 극도로 자제한 정원이라는 점이 바로 그렇다. 자연의 순수한 본성과 미를 드러내는 식물들 외엔 일절 인위적 치장을 보태지 않았다. 정원에 구사한 디자인과 디테일 요소를 중시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흡족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민간정원이 흔히 카페·벤치·테이블·디딤석·정자·조명·파고라 등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구조물을 다수 집어넣지만, 이 정원에선 벤치 두어 개가 보일 뿐이다. 불친절한 정원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정원이 인공을 철저하게 삼간 덴 의도가 있다. 방대한 정원 조영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요긴하게 배분하기 위한 궁여지책의 산물은 아니다. 정원주인 김창옥 선생의 뚝심에 찬 정원 철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농대를 나와 평생 원예 관련 일을 해온 그는 이른바 자연주의 정원을 구현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이번 생에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이라는 일념으로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에 매진했다. 양손 손금이 다 뭉개지도록, 칭얼거리고 투덜거리는 나무들을 자식처럼 어루만지며 군더더기 없이 순수한 식물원을 꾸렸다. 식물에만 집중하라고. 나무와 화초랑 기탄없는 교제를 해 삶의 피로와 권태를 헹구라고.

5월의 정원은 약동한다. 초봄을 물들였던 연두를 삼킨 나무들이 드디어 초록을 토하기 시작해 싱그럽다. 해일처럼 거침없는 초록의 범람, 그 한복판으로 들어서자 마음 기슭에 환한 빛살이 들이치는 양 기껍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심중에 초록을 가득 들여놓을 수 있다니. 소소한 행운 이상의 푸른 에너자이저로 다가와 감각을 일깨운다. 광합성 공장을 힘차게 가동하는 나무들의 도도한 생명력을 수혈받은 듯이.
산책로는 숫제 숲을 이루다시피 무성한 나무들의 촌락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숭얼숭얼 벙그러진 꽃떨기를 매단 나무도 많다. 덕분에 먹구름 두꺼워 어둑한 한낮의 산책로 곳곳이 밝다. 꽃향기와 흙내가 칵테일처럼 섞여 콧등을 친다. 향기로워 걷기 좋은 길이다. 자연이 분비하는 냄새엔 똑똑한 성분이 많은데, 그것은 후각을 깨우는 데 그치지 않고 심리적 안정감까지 가져다준다. 우리가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고귀한 향기를 선사하는 자연과 자주 만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이 정원엔 매우 다채로운 수종이 산다. 250여 종에 달하는 교목과 관목과 화초류가 동거한다. 해서 꽃이 흔하다. 겨울 한 철을 빼고 날마다 꽃이 피고 진다. 봄기운 스멀거리는 2월 말이면 납매와 조록나무가 개화하고, 마침내 봄이 도착하면 매화·벚나무·목련·동백 등이 꽃 폭죽을 터뜨린다. 지금은 공조팝나무·황철쭉·낙상홍·산다화·목수국·불두화·금목서 등이 꽃을 뿜어 올리고 있다. 얼마 뒤엔 지천으로 널린 수국이 꽃 경연에 뛰어들 참이다.
흥미로운 건 화초류보다 교목과 관목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나무들 대다수가 거목이다. 길차게 자라길 거듭한 거목들의 외양엔 한 점 결함이 없다. 거목 중에서도 크고 높고 빼어나 외경을 느낄 수밖에 없는 소나무들을 보라.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세공으로 완성한 공예 작품처럼 낱낱이 아름답다. 적어도 100년 이상 긴 세월을 살아낸 생명체다운 숭고미가 완연하다. 살면 살수록 늙어 추레해지는 사람과 살면 살수록 청년처럼 수려해지는 소나무는 얼마나 다른가.

대체 소나무의 비결은 무엇일까. 저 나무의 웅자를 가능케 한 생태적 전략이 한둘에 그치지 않겠지만, 그 무엇보다 주어진 환경에, 운명에 굴하지 않는 적응력으로 기세를 돋우는 게 아닐까. 소나무가 절개의 상징인 건 사철 푸르고 꼿꼿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은 것만은 아니다. 원가지에도 곁가지에도 곡선으로 굽은 부위가 숱하다. 긴 세월을 통해 비와 바람과 폭설에 시달리다 보면 천하의 소나무도 비틀리고 휠 수밖에.
사자가 밀림의 제왕인 건 타고난 용맹성 때문만은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기지 덕분이기도 하다. 소나무도 마찬가지. 의연하되 유연하게 타협할 줄 아는 나무다. 강하기만 한 것은 부러지기 쉽다. 현명한 적응력을 가진 것은 휘고 굽힘으로써 삶을 지속한다. 일찍이 노자가 일렀다. ‘단단한 치아는 나이가 들면 빠지지만, 부드러운 혀는 오래 남는다.’ 강한 척 뻣뻣하게 살지 말란 얘기다. 유연성과 겸손이 딱딱한 고집보다 윗길에 있다는 귀띔이다. 소나무가 전하는 묵시적 메시지 역시 똑같은 게 아닐까.

산책로를 따라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정원 곳곳을 감상한다. 볼거리는 넘친다. 거목들이 도달한 충만함과 완전성의 장관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정원이 품은 최상위 경관에 속할 ‘범바위’ 구역에선 바위와 노송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정원은 차가운 생존경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거목의 몸을 휘감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의 곡예는 치열한 분발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계의 냉엄한 원리를 알게 한다. 덩굴식물은 ‘조용한 암살자’이기도. 나무를 감고 올라가 햇빛을 차단해 광합성을 훼방하고 줄기를 야무지게 조임으로써 수액의 흐름을 차단, 고사시키기도 한다. 자비로운 나무도 흔하다. 늙은 모과나무를 보라. 푹 팬 채 썩어가는 둥치 한 자락을 통째 새와 곤충들의 서식처로 내주었다. 보살행이다.
나무와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거대 정원을 일군 정원주가 바라보는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나무를 척 보면 안다. 어디가 아픈지, 목말라하는 걸, 배고파하는 걸, 나무가 웃거나 우는 걸…. 나무의 속사정에 달통한 그의 얘긴 이렇다.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솔하고 따뜻한 사람처럼, 묵묵히 제 길을 제대로 간다.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선인(善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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