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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과 같고 열여섯 처녀 같은 시간

기사입력 2019-04-02 09:34

[동년기자 페이지] 동년기자들의 아침맞이

자명종이 울리면 전쟁 같았다. 아침상을 차리며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고, 도시락을 싸고, 준비물을 점검하고, 늘 뭔가를 찾아대는 남편을 챙겨주고, 나도 출근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강아지까지 짖어대며 자기 좀 봐 달라던 아침. 이젠 까마득해진 시절의 아침 풍경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매일 아이 준비물을 미리 챙겨 현관에 놔두곤 했는데 “다녀오겠습니다” 하면서 급하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 10분쯤 뒤에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하고 문을 열었더니 아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가방을 내밀었다. 내 수영가방이었다. 현관에 놓인 가방을 무심코 들고 나간 아이가 얼마쯤 걷다 보니 엄마의 수영 가방을 들고 있더라는 것.

아침은 푸른 사과 같고, 열여섯 처녀 같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 비늘 같다. 동쪽에서 올라온 햇빛이 대지 구석구석을 채우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다. 기분 좋아지는 서늘한 공기, 싱그러운 흙냄새. 그 생기와 에너지를 못 챙기는 아침이면, 즉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날은 바이오리듬이 급격히 떨어진다. 아침이 늦으면 하루가 짧다. 그러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몹시 서운해진다.

젊어서는 커피를 한 모금이라도 마셔줘야 잠이 깼다. 그러나 요즘은 눈을 뜨면 더운물을 한 컵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따스한 물이 몸에 좋고 수분 섭취를 늘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약처럼 마신다. 공기가 안 좋은 날 아침에는 헬스장으로 달려간다. 스트레칭과 걷기를 하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공원 모퉁이를 걸으면 종종 건초 냄새가 난다. 풀 깎는 기계음은 거슬리지만, 내음이 풋풋하다. 지난해 쐐기풀과 금잔화 향기가 나던 곳이다. 요즘은 마른가지에서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뭔가 잔뜩 숨기고 있는 듯한 나뭇가지 끝 멍울이 탱탱하다.

새벽안개를 묻히고 한가롭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 어귀에서 빵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진다. 버터 향도 마구 파고든다.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걸음을 재촉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웃들 걸음이 분주하다. 일터로 달려나가는 모습에서 삶의 활기가 느껴진다. 꽃망울처럼 터지는 어린아이들의 미소에서는 사랑이 넘친다. 꽃이 필지도 몰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지 않는 풀포기도 아끼고 사랑했던 엄마는 푸른 잎이 너무 좋다고 했다. 그냥 사랑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아침은 늘 새롭다. 매일 출발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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