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말리지 마! 난 일밖에 몰라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도 많다고.
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
“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