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조용했던 뜨개질 방이 술렁거렸다. 이제부터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다니. 잠시나마 당황했다. 손녀뻘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알록달록 형형색색 끈을 펼쳐보였다. 막상 눈앞에 놓아둔 것을 보니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랑 할머니랑 도란도란 앉아서 우리네 옛 매듭을 엮어 만들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샘솟았다. 전통매듭과 함께 소녀시대로 돌아간 송파시니어클럽의 술술맵시단을 찾아갔다.
전통매듭이 뭐길래?
“작은 선생님, 이리 좀 오셔봐요. 나 길을 잃어버렸어. 요놈 가져다가 넘기지? 하나는 잘 넘어왔는데 하나가 영 안 되네.”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상에 바짝 앉아 ‘오벌가락지매듭’을 만들고 있던 한미자 씨였다. 매듭이 제 길을 찾아 잘 가나 싶었는데 결국 헤매고 말았다며 최현숙 선생을 불러 세운다.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이용해 끈과 끈이 오가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전통매듭이 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송파시니어클럽에는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8명의 여성 시니어가 모여 매듭을 배우느라 열기가 가득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1월이면 전통매듭을 만난 지도 5개월째다. 기초 매듭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니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젊은이들처럼 손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아가 예술성과 함께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시니어 취미를 넘은 수익활동 영역으로까지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전통매듭을 시니어와 함께 해보겠다며 송파시니어클럽에 노크를 한 이들은 30대가 주축인 문화예술사업단 술술공작소다.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시니어의 자세가 남달라 새삼 놀랐다.
“기초적인 매듭부터 하나하나 지어나가면서 완벽하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가 수업입니다. 저희가 매번 와서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 하루는 교육하고 그다음 시간은 숙제로 내드린 것을 해오게 합니다.”
매듭을 배우기 위해 시니어 학생들이 교실 안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좌석 배치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본매듭을 배우는 단계와 만들어진 매듭을 적당한 색상으로 배합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단계로 나눠서 일사분란하게 구성원들끼리 호흡을 맞춘다.
술술맵시단, 젊은이와 전통을 공감하다
전통매듭이라는 분야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고 보급할까 고민했다고 강순주 대표는 말했다.
“다른 지역의 시니어 관련 기관에도 가봤습니다. 마침 송파시니어클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셨어요. 이곳에서 뜨개질하는 시니어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전통매듭을 하는 시니어는 송파시니어클럽의 사업단 중 하나인 한코한코손뜨개사업단 소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주방용 아크릴 수세미 상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해왔다.
“뜨개질도 하는데 전통매듭을 만들어보시라고 제안을 드린 것이죠. 아무래도 손뜨개를 하는 분들이니까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거나, 집에서 만드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80대 시니어가 적지 않았다고. 30대 젊은 강사가 전통매듭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시니어에게 옛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것이 연봉매듭이에요. 왕의 곤룡포를 비롯해서 한복이 쓰이는 단추매듭이죠. 한 어르신이 옛날에는 시집가기 전에 옷감 자투리를 말아서 단추를 해가지고 가는 것이 혼수품이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만들어 쓰던 매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매듭이 생각 안 나면 어른들이 그러셨대요. 내가 이제 갈 때가 됐구나.(웃음)”
세대 간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이렇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세대 공감 프로젝트로 보였다. 5개월쯤 함께 활동한 후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도 신중한 고민을 거쳐 내놓았다. 바로 술술맵시단. ‘매듭을 만드는 시니어 모임’이라는 뜻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잖아요. 설명해드려도 모르는 게 있다 하시면 옆에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없을 때도 작업을 꽤 잘하십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이분들이 정식으로 자격증을 따고 더 나아가 또래 시니어는 물론 다양한 분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매듭을 가르쳤으면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작고 아담한 작업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눈과 손은 예리하게 반응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뜨개질을 오래도록 해왔던 이희자 씨는 “전통매듭이 생소한 분야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들면서 가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 초반 ‘오벌가락지매듭’으로 고생하던 한미자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던 모습만 봤는데 젊은 선생님에게 배우게 됐다”며 좋아했다. 술술맵시단 고령자 중 한 명인 김정애 씨는 “손을 많이 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지역 행사 때 어린아이들한테 매듭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보람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80대인 김을용 씨는 “너무 못 따라가고 민폐일까봐 고민을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셔서 만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다가와 새로운 걸 가르쳐줍니까.” 술술맵시단 시니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여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진지하게 매듭을 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술술맵시단의 멋진 미래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
클래식 소녀 국악을 만나 전통예술을 깨치다
전통매듭을 가르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35세의 클래식 전공자였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교수들과도 격 없이 지냈다는 강순주 대표에게 국악과 교수들은 “클래식 작곡 전공자가 국악을 하면 더 가치 있지 않겠냐”며 조언했다. 그때의 강한 끌림으로 졸업과 함께 락음국악단(예술나눔청년사업단)에 들어가 3년 여 활동했다. 뜻 맞는 음악 친구들과는 전통예술단 ‘호연(浩演)’을 만들어 11년째 활동 중이다.
“예술 분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원금이 없으면 예술 단체는 힘들거든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잖아요. 지원도 걱정이 되고 자립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국악기에 달린 매듭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악기는 애지중지 닦고 조율하면서 매듭술은 악기 처음 샀을 때 있던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꼬질꼬질해졌다. ‘매듭술 만드는 곳 어디 없나?’ 하다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 선생님한테 제 전공부터 시작해서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말씀드렸어요. 상황을 들으시고는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사범증을 따고 나니 뭔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술술공작소다. 작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스타트업센터 예술 분야 업체로 선정돼 입주했다. 다양한 축제에 전통매듭으로 참여하다 보니 협업이 가능한 동반 집단이 있으면 좋을 듯싶어 다양한 계층을 만났다.
“다문화가정 여성들도 가르쳐보고 보호관찰소 여학생들도 만나봤어요. 꼼꼼하고 실력은 좋은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시니어에게는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전통이나 매듭을 생각하면 시니어를 떠올리게 되니 진부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모를 얘기, 특히 매듭과 관련한 추억을 들려주시는 시니어 덕이 컸다. 최근엔 조금씩 수익도 내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과 작업했던 작품이 면세점에서 판매됐다.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전통을 시니어와 함께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스토리를 담은 음악극도 훗날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음악가로서 포부도 밝혔다.
“우리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매듭이 자리를 잡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원활하게 돌아가면 음악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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