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답사기]
오래 걷지 않아도 된다. 숨이 찰 만큼 산을 오르지 않아도 깊은 숲이다. 편한 운동화 신고 그저 천천히 나무 사이를 걸으며 오래된 시간을 바라보는 것. 이번 가을에는 멀리 가지 않아도 깊숙한 시간을 숲에서 만난다. 시간이나 체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마음에 오래 남는 것, 홍릉숲에서는 가능하다.

제법 선선해진 가을이다. 호젓한 기분으로 도심 한복판의 오래된 숲으로 들어간다. 금세 도시의 소음이 멀어졌다. 홍릉숲에 들어서자마자 새소리가 들리고 달라지는 공기의 느낌이 청량하다. 새벽에 뿌린 비로 숲이 수분을 가득 머금었다. 소나무 솔잎엔 아침이슬이 구슬 꿰듯 알알이 박혔다. 하늘은 흐리지만 지치도록 무덥던 여름볕을 온몸으로 받아낸 숲의 기운이 힘차다.
숲에 드는 일은 적은 수고로 큰 시간을 얻는 여행이다. 심신의 건강과 일상 회복을 위해 숲이라는 공간이 좋은 매개가 된다. 특히 독립적 사유의 시간을 제공받기에 숲만 한 게 없다. 나이 들면서 때때로 자녀에게 심리적 의존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인생 후반기의 독립은 단순히 혼자 의식주를 해결하거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매일 자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동행을 원하는 식의 위험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시간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럴 때 혼자 거닐 수 있는 가까운 숲에 먼저 다가가 보자. 정서적 독립의 만족과 나만의 사색을 누릴 수 있는 가까운 숲은 이것을 연습하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
홍릉숲은 서울 동대문구의 번화한 거리와 빌딩, 대학가와 병원이 빼곡한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별생각 없이 도심 속 숲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숲을 잘 들여다보면 이곳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1922년 임업시험장이 들어서면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수목원이다. 지금도 국립산림과학원의 전문 수목원으로 국내외 식물 유전자원을 수집·보존하고 산림과학 연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약 41.8㏊의 숲에 2000종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단순한 산책 공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홍릉이라는 이름에는 이보다 더 오래된 시간이 담겨 있다. 홍릉은 본래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자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후 명성황후의 능을 남양주로 옮겼고, 그 자리에 임업시험장이 들어섰다. 한때 전쟁으로 숲이 크게 훼손됐지만, 1960년대 다시 조성되면서 세월의 심연이 담긴 모두의 명품 숲으로 거듭났다.
이제 서울의 오래된 정원 홍릉숲이 활짝 열렸다. 지난 30여 년간 주말에만 자유 관람이 가능했다. 올해 3월 홍릉숲 개방 확대로 역사가 담긴 아름다운 숲을 언제나 공유할 수 있게 됐다. 하늘을 가린 나무숲이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피톤치드 자연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우리가 사는 일상의 공간과는 온도와 습도가 확연히 다르다. 깊은 숲의 생명력과 압도적인 그늘 속에 그저 푹 파묻히기만 해도 좋다. 여기선 숲을 많이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만히 천천히 스며드는 게 목적이 된다. 숲 여행은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잠시 덜하는 시간이다. 가까운 곳에 이런 숲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시에서의 삶이 조금은 든든해진다.
홍릉시험림이라는 정식 명칭이 아니어도, 이곳이 숲을 연구하고 이 땅의 산림 연구 현장임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산림과학관을 먼저 들러보자. 이곳에선 홍릉숲 100년 역사와 연구 성과를 볼 수 있다. 온통 목재로 이루어진 내부에선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긴다. ‘숲과 만나다’, ‘숲의 이야기를 발견하다’ 등 숲의 생태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실내를 구성했다. 산림의 생태적 가치와 기후 위기 대응 전략의 자세한 전시 덕분에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진다. 영상관에서는 숲과 산림에 관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홍릉숲은 숲의 생태적·학술적 가치를 상징하는 ‘홍릉 8경’을 선정했다. 봄철 눈부신 벚꽃을 피우는 웅장한 왕벚나무가 1경이다. 2경 산림과학관, 3경 밀레니엄 동산, 4경 밤나무 3형제, 5경 홍릉숲 최대 고령목인 반송, 6경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복수초, 7경 키다리 노블포플러, 8경 낙우송 숲이다. 홍릉 8경 동선을 따라 돌아보면 풍성한 숲 여행이 된다. 이제 가을을 맞은 숲에 무궁화·배롱나무꽃·진노랑상사화·맨드라미·나팔꽃 같은 친근한 꽃들이 제각각 피고 지는 중이다.
숲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숲 해설 프로그램 이용을 추천한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숲나들e’나 국립산림과학원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된다. 요즘처럼 날씨 좋은 계절에는 예약이 빠르게 마감된다. 숲 해설은 홍릉 1경인 왕벚나무 쉼터에 모여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시작하는데, 숲의 가치와 생태 이야기가 매우 유용하다. 준비된 루페(관찰용 단렌즈 확대경)로 식물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즐기는 한 시간 남짓 숲 해설 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따로 발걸음하는 곳으로 침엽수원 옆의 명성황후 능터와 고종이 명성황후 만나러 오가며 목을 축였다는 어정(御井)이 있다. 사색하기 좋은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넓은 잔디광장에 점잖게 서 있는 홍릉숲 최고령목 반송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30여 년 홍릉숲을 지켜온 산증인이다. 웅장한 반송 주변으로 국립나무병원과 산림청 국립과학원 건물이 보인다.
밀레니엄 동산엔 새천년 이전의 기록물을 담은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걷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나무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노블포플러는 국내에 기록된 나무 중에 가장 키가 큰 나무다. 최근 측정 결과 높이가 38.97m로 확인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듯 노블포플러 끄트머리를 향하면 아득하게 푸른 가을 하늘이 보인다. 어린아이들은 숲 탐험하듯 놀고, 나무 사이로 청설모가 지나가는 낙우송 숲길 쉼터에선 시민들이 도심 속 완벽한 힐링을 누린다.
홍릉숲은 화려한 조경과 잘 꾸민 포토존을 세워놓은 수목원과는 다르다. 조금 거칠어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과 공존하는 명품 숲이다. 기품 있는 숲에서 나무의 깊이 있는 울림을 느껴보는 건 꽤 의미 있다. 우리가 바쁘게 지나온 또 다른 시간이 고요히 흐르는 홍릉숲이다.

세종대왕기념관, 영휘원, 숭인원
홍릉숲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세종대왕기념관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는 한글날이 10월에 있음을 떠올리면서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길옆 언덕을 따라 오르면 잔디마당 중심의 세종대왕 동상이 맞아준다. 잔디밭 양옆으로 줄지어 선 구영릉 석물,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옥외 전시물이 볼거리다. 실내 입구엔 훈민정음 서문이 벽면을 채웠다. ‘나랏말미 中듕ᇰ國귁에달아’ 친숙한 구절의 글자체가 새삼 반갑다. 박물관 내부는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로 구성됐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무렵인 조선시대부터 근대 활자 개발까지 우리의 한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문화공간이다. 참고로 세종대왕기념관 바로 옆 아트센터도 들러봄 직하다.
세종대왕기념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적 제361호 영휘원과 숭인원은 한 공간 안에 모신 대한제국 황실의 무덤이다. 영휘원은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엄 씨의 무덤이고, 숭인원은 영친왕의 장남, 이진 원손의 무덤이다. 묘역 안으로 드니 도심 속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늑하다. 생각 외로 넓고 고요해서 차분히 산책하기 좋다.
동대문구 역사, 자연, 예술, 그리고 쉼
같은 지역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일명 DDP), 한양도성박물관, 낙산공원 성곽길, 이화마을도 들른다면 알찬 마무리다. DDP( Dongdaemun Design Plaza)는 약칭으로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린다(Play)’는 의미가 담긴 복합문화공간이다.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독특한 곡선 건축물의 조명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신비로운 내부구조와 함께 늘 다양한 전시가 진행돼, 문화예술의 매력을 듬뿍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부근엔 길게 뻗은 낙산성곽길의 운치와 볼거리 많은 이화마을이 이어진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하루가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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