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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3초 나오지만 열정은 주연급이에요”

기사입력 2020-12-18 09:32

[스마트 시니어를 만나다] 단역배우 임유란

떡볶이집 주인부터 전단지 아주머니, 진상 고객까지 스쳐 지나가는 드라마 속 찰나의 장면에서도 열연을 펼치는 배우가 있다. 단역 배우 임유란(50) 씨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주부로 살다 40대 중반에 다시 연기 활동에 발을 들인 임 씨는 5년간 50여 개의 역할을 맡으며 단역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비록 역할에 이름 하나 없고 대사는 길어야 세 마디지만, 촬영장에 갈 때마다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떨린다는 그녀를 만나 단역 배우의 삶을 들어봤다.


▲단역배우 임유란(50) 씨(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단역배우 임유란(50) 씨(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단역 배우 임유란을 소개하자면 이 영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이다. 그녀는 영화 시작 단 2분 만에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케 한 장면, 바로 ‘벤츠신’의 주인공이다. 일명 ‘벤츠 아줌마’로 15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극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임유란은 단역 배우 인생 처음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자칭 천만 배우 임유란입니다. ‘극한직업’에서 경찰에 쫓기는 마약범에게 차를 빼앗겨 넘어졌다가, 찰진 욕을 하며 마약범을 때려잡는 역할이었어요. 영화에서는 짧게 나왔지만, 사실 4시간 동안 촬영한 장면이에요. 40℃ 가까이 되는 더운 여름에 넘어지고 또 넘어졌죠. 그래도 너무 감사해요. ‘극한직업’ 덕분에 천만 배우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게 됐거든요.(웃음)”

잠깐의 대화에서도 유쾌한 에너지와 남다른 끼가 느껴지는 그녀는 보기와 달리 꽤 평범한 삶을 살았다. 대학 시절 마당극 동아리에 들어가 장진 감독과 연극을 함께하고 졸업 작품으로 배우 김나운과 함께 춘향전을 공연했지만, 졸업 후에는 연기의 길을 걷지 않고 비서 일을 하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결혼했다. 이후 가사와 육아에 충실했던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연기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9년 전쯤, ‘이승연과 100인의 여자’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주부 판정단에게 주는 선물이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바로 방청 신청을 했죠.(웃음) 그런데 방송국에 주부 모델 캐스팅하는 분들이 오시더라고요. 제가 부끄럼 없이 말을 잘하니까 그분들 눈에 띈 거죠. 자연스레 방송국을 드나들다 보니 단역 배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모든 게 물 흐르듯 착착 맞아떨어져서 신기했죠.”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카메라 뒤편 보이지 않는 고충

약 20년 만에 단역 배우로 다시 발을 내디딘 임 씨는 20대의 마음으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역의 세계는 열정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녹록지 않았다. 대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역할 하나를 따내는 데 최소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복잡한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어렵사리 역할을 얻어 수 시간씩 촬영을 해도, 정작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은행 인질 역에 캐스팅돼서 추운 겨울날 2박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무릎보호대까지 차고 촬영했는데, 본방송에서는 아웃포커스로 나오더라고요. 주변 사람도 저인 줄 몰랐을걸요.”

임 씨는 단역 배우의 또 다른 고충으로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꼽았다. 극에서 비중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 만큼, 언제까지 출연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일회성 촬영을 제외하고 임 씨는 자신의 역할이 대본 속에서 사라질까 가슴 졸여야 했다.

“가사도우미 역이 단역 중 안정적인 편이에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웬만하면 계속 출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 보니, 주연 배우가 극 중 가사도우미로 취직을 했대요. 제가 주연을 어떻게 이겨요.(웃음)”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열정의 분량은 단역 아닌 ‘주연급’

배우보다 주부로서의 삶이 더 길었던 그녀지만, 사실 임 씨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컸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이 직장에 나가고 집에 홀로 남으면 친구를 데려와 상황극을 하며 놀았고, 매년 성탄절엔 교회에서 연극을 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결혼 후에는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전래 놀이를 가르치며 “여기가 내 무대야” 하고 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실제로 임 씨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50여 차례의 단역 활동을 비롯해 홈쇼핑 광고, 중년 의류 브랜드 모델 등을 겸하며 다방면으로 뛰어다녔다. 그녀에게 대단한 연줄 하나 없이 끝없는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자신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배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작은 역이라도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더 잘 살릴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미용사 역을 맡았을 땐 얼룩이 묻은 앞치마에 빗 3개를 꽂아 갔고, 전단지 돌리는 아주머니 역을 할 땐 선캡과 장갑을 준비했죠. 자식들한테 전단지 돌리는 연습도 했어요. 노력한 게 보였는지, 촬영 당일 카메라에 잘 나오는 자리로 바꿔주시더라고요.”

임 씨의 ‘열정 행보’는 촬영장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그녀는 SNS를 활용해 자신의 이름을 꾸준히 알렸다. 지난 4월 유튜브 채널 ‘주부 배우’를 만들어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속 장면을 올리며 자기PR을 했고,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서는 협찬과 광고를 받아 일이 들어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부수입을 올렸다.

“유튜브요? 어려웠죠. 그래서 발품을 팔았어요. 찾다 보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있더라고요. 저자 분께 ‘선생님, 저 영상 배우고 싶어요’ 하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냈어요.(웃음) 어려워도 배우면 돼요. 계속 공부하면서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연기 향한 순애보의 짝사랑

초점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주연 배우의 곁에서 맴도는 단역 배우에게 카메라는 어느 노래 제목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존재. 임 씨는 연기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좋아하는 마음도 몰라주고 곁을 내어주지도 않아 야속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소녀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단역 배우는 늘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또 선택받았다고 해서 화면에 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단역이라고 배우가 아닌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본 영화 중 이런 장면이 있어요. 영화감독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을 놀리려고 ‘너네 아빠 작품도 없는데 영화감독 맞냐?’ 하고 빈정대요. 그러자 주인공이 ‘수박 장수가 수박 안 팔린다고 수박 장수 아니냐?’ 하면서 맞받아치거든요. 저는 힘들 때마다 그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요.”

지난해 초 임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해는 한 달에 세 번만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원을 적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냐고 묻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새해 소원은 무엇일까. 2년 전에 비하면 한층 더 커다래진 포부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인지도를 보유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름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얼굴만 보고 ‘저 사람 어디 나왔잖아’ 하고 알아봐주신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언젠가는 꼭 이 짝사랑의 결실을 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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