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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아니라 배움이다

입력 2026-09-0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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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으로 채운 해외 한달살기] 중장년이 해외로 떠나는 이유

▲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중장년의 해외 체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오전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엔 시장과 도서관을 찾아 배운 표현을 써본다. 현지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와이너리나 공방에서 그 지역의 역사와 기술을 경험한다. 한 도시에서 한 달을 지내더라도 목적은 ‘살아보기’보다 ‘배워보기’에 가깝다.


여행 그 자체보다 배우기 위해 머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외국어와 문화·예술은 물론 요리·와인·역사·자연생태·사진·공예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몇 개월에 걸쳐 현지에 머물며 수업과 일상을 연결한다. 중장년의 해외 배움은 갑자기 생긴 유행이 아니라 수명 연장과 생애 전환, 경제력, 자기계발 욕구가 한 지점에서 만난 결과다.


퇴직은 빠르고, 배우며 살아갈 시간은 길어져

중장년의 해외 배움을 이해하려면 먼저 길어진 생애를 봐야 한다. 과거에는 학교를 졸업해 직장에 들어가고, 한 분야에서 일하다 은퇴하면 사실상 배움도 끝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교육은 인생 초반에 끝내는 준비 과정이 아니라, 직업과 역할이 바뀔 때마다 자신을 다시 설계하는 수단이 됐다.


▲그래픽=유영현 기자 redeye112@ㆍ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그래픽=유영현 기자 redeye112@ㆍ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한국교육개발원의 ‘커리어 전환기에 놓인 4050 성인 학습자의 평생교육 지원 방안’(2023) 연구는 우리나라 근로자가 주된 일자리에서 평균 49.3세에 퇴직하지만, 희망 근로 연령은 70세라고 짚었다. 첫 직장을 떠난 뒤에도 약 20년간 일하고 활동하기를 원하는 셈이다. 퇴직과 완전한 은퇴 사이가 길어지면서 40~50대는 자신의 경험을 어디에 쓸 것인지, 무엇을 새로 배워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

한국교육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중장년 성인 학습자의 46.9%가 자신의 커리어 전환 준비 수준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전환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역량 부족’(18.5%)을 꼽았고, 재원 부족(14.1%)과 체력 등 건강 문제(13.5%)가 뒤를 이었다. 배움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성인의 학습은 꾸준히 이어진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의 ‘한국 성인의 평생학습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25년 만 25~79세 성인의 평생학습 참여율은 33.7%로 나타났다. 성인 세 명 중 한 명이 학교 정규교육 밖에서 직업 능력, 인문교양, 문화예술 등을 배우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40~50대는 기술과 지식의 향상만이 아니라 네트워크 구축과 관리, 정신적 스트레스 대처, 창업 역량 등 삶의 전환에 필요한 여러 영역에서 높은 교육 수요를 보였다. 배움의 목적도 자격증 취득이나 재취업을 위한 공부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탐색하고 새로운 관계와 역할을 만드는 학습으로 넓어지고 있다.

해외 배움은 중장년에게 이 두 가지를 함께 채워준다. 외국어와 전문 지식을 얻는 동시에 익숙한 환경에서 잠시 떨어져 다음 생애를 생각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유영현 기자 redeye112@ㆍ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그래픽=유영현 기자 redeye112@ㆍ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해외에서 배워야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 수업, 미술사 강의 등 대부분 국내에서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중장년이 해외 배움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학습 내용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중장년은 직장에서는 직함으로, 집에서는 부모이자 배우자로, 때로는 고령의 부모를 돌보는 자녀로 불린다. 하루의 시간표는 업무와 가족 일정에 맞춰져 있고, 공부를 시작해도 기존 역할의 틈에 끼워 넣어야 한다. 반면 해외에선 이러한 역할에서 벗어나 오롯이 학습자가 될 수 있다. 평생 누군가를 책임져온 사람이 다시 질문하고, 틀리고, 도움을 청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얻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낯선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수업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숙소와 식당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작은 성공이 쌓인다. 은퇴나 이직을 앞두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한 중장년에게 이런 경험은 자기효능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해외라는 환경은 배운 내용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국내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면 수업이 끝나는 순간 한국어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해외에서는 주문하고 길을 묻고 이웃과 인사하는 일까지 모두 학습의 연장이다. 미술을 공부한다면 교실에서 작품을 배운 뒤 실제 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요리를 배운다면 현지 시장에서 식재료를 고르는 과정까지 연결된다. 교재 속 지식이 생활 경험으로 바뀌는 것이다.

세대와 문화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직장과 가족 중심으로 좁아진 중장년의 관계망에 해외의 교실은 새로운 네트워크가 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동년배와 은퇴 후 계획과 가족·건강·취미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기 삶을 다른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고, 젊은 학습자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면 세대 차이를 직접 경험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된다.


패키지여행 다음은 ‘배움이 있는 체류’

중장년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현실적 기반도 넓어졌다. 코로나19로 막혔던 해외 이동이 정상화됐고, 숙소와 항공권을 직접 예약하는 플랫폼과 번역·지도 앱이 보편화됐다. 과거 유학원이나 여행사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던 일정도 비교적 쉽게 설계할 수 있게 됐다.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2025년 국민 해외 관광객은 약 2955만 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숫자가 해외 학습자 증가를 의미하진 않지만, 장기간 닫혀 있던 해외 이동의 문턱이 다시 낮아졌음을 보여준다. 해외여행 경험이 축적된 중장년에게 익숙한 여행지에서 1~2주 더 머물며 수업을 듣는 선택은 과거의 장기 유학보다 현실적인 도전이 됐다.

해외 교육기관 역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국제 어학연수 시장에는 연령을 구분하지 않는 일반 과정 외에 ‘40+’, ‘50+’, ‘골든 에이지’ 등 별도 상품군이 생겼다. 수업 속도를 조절하고 회화 비중을 높이는 한편, 미술관 방문과 요리·역사·와인·도보 탐방을 교육과정에 결합한다. 젊은 학생 중심의 기숙사 대신 홈스테이·레지던스·호텔 등 숙소 선택지도 넓혔다.

한달살기도 다르지 않다. 정해진 수업 외에 짧게는 1~2주, 길게는 4주 넘게 현지에 머물며 몸으로 부딪힌다. 시장에서 흥정하며 장을 보고, 도서관 시민강좌에 참석하고, 공방에서 손을 움직여 기술을 익힌다. 오래 머문다고 저절로 배움이 되는 건 아니다. 관광과 배움을 가르는 건 며칠 머무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여행에서 삶을 바꾸는 경험으로

중장년의 해외 배움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여행의 효용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러 관광지를 빠르게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은 이동과 예약의 부담을 덜어주지만, 여행이 끝난 뒤 일상에 남는 변화는 제한적일 수 있다. 해외 경험이 쌓인 사람일수록 유명한 장소를 더 많이 보는 것보다 한 지역을 깊이 이해하고 현지의 일상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배움은 체류에 분명한 목적과 리듬을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 수업에 가고, 같은 카페와 시장을 이용하며, 동료 학습자와 과제를 수행한다. 관광객이 도시의 바깥을 지나간다면 학습자는 일정 기간 그 안의 생활자가 된다. 혼자 떠난 사람도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들 수 있어, 낯선 곳의 외로움과 불안을 줄여준다.

다만 해외 배움을 성장 서사로만 볼 필요는 없다. 비용과 체력, 언어의 장벽이 있고 프로그램의 질도 제각각이다. 유명 관광지가 많이 포함됐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하면 수업은 형식에 그칠 수 있다. 프로그램을 고를 땐 수업 시간과 강사의 전문성, 참여자의 연령 구성, 현장 활동, 숙소 접근성, 의료 지원을 함께 살펴야 한다.

중장년의 해외 배움은 여행을 부정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얻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시간을 자신의 다음 삶과 연결하는 방식이다. 젊은 시절의 유학이 취업 자격을 얻는 과정이었다면, 중장년의 해외 학습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다시 학생이 되어 낯선 곳에서 질문하고 실패하고 익히는 경험. 그것이 지금 중장년이 해외로 떠나고 싶어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반세기 넘게 검증된 시니어 학습 여행, 로드 스칼라와 U3A

‘배우기 위해 떠난다’는 흐름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엔 반세기 넘게 이 수요를 받아온 모델이 있다. 다만 두 모델은 운영 철학부터 다르다.


잘 짜인 프로그램 따라 떠나는 교육 여행, 미국 ‘로드 스칼라(Road Scholar)’

1975년 사회운동가 마티 놀턴과 대학 기숙사 관리자 데이비드 비앙코가 설립했다. ‘엘더호스텔(Elderhoste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10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놀턴은 나이가 들면 정신 능력도 반드시 쇠퇴한다는 통념에 반대하며, 대학 캠퍼스를 숙소 삼아 중장년이 배우고 머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로드 스칼라는 여행사가 아니라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비영리 교육기관’을 자처한다. 정치·역사·문화예술·자연과학·와인·요리까지 주제가 다양하며, 오전엔 전문가 강의를 듣고 오후엔 현장을 직접 찾는 방식으로 하루 일정이 이루어진다. 현재 전 세계 90개국에서 8000개 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한 해 참가자만 10만 명, 설립 이후 누적 참가자는 500만 명을 넘는다. 대상은 50세 이상이며, 참가자는 정해진 상품을 구매해 참여하는 구조다.


회원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조 공동체, 유럽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제3기 인생대학)’

1973년 프랑스 툴루즈대학교에서 노년학 강좌 형태로 시작됐다. ‘제3기’란 직업과 자녀 양육의 책임을 마친 뒤 개인적 성취에 집중하는 인생 단계를 뜻한다. 프랑스·벨기에·폴란드 등 ‘대륙형’은 대학과 정식 제휴해 구조화된 강의를 제공하지만, 1981년 영국에 전해진 ‘영국형’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은퇴자들이 원하는 내용을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자조(Self-help)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 지원 없이 최소한의 회비로 자체 운영하는 ‘자율성’이 핵심 원칙이다. 1983년 영국 자선단체 ‘제3기 트러스트’ 설립과 함께 첫 U3A 그룹이 생겼고, 지금은 호주·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로도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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