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
5년 동안 15번의 방어전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챔피언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장정구(張正九·56). 사각 링 위에 올라서면 그는 한 마리의 야수로 변했다. 상대가 주먹을 맞고 쓰러지면 장내는 “장정구! 장정구!” 그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체육관 입관비로 1500원을 겨우 냈던 그가 대전료로 7000만 원을 받는 복싱 스타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0년대 복싱 인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십니더. 그때만큼의 인기를 되찾긴 힘들 거라 봅니더. 그래서 기분이 좀 그렇십니더.”
강렬한 사투리 뒤로 오늘날의 복싱을 생각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야구선수의 연봉이 2000만 원이었던 시절, 장정구의 대전료는 한 경기당 7000만 원, 방어전 후반에는 1억 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 액수만 봐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당시의 복싱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복싱 중계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는 한산했다. 대신 TV가 있는 전파상과 다방에는 경기 중계방송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린 시절의 장정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TV 앞에 서서 주먹을 뻗으며 복싱선수를 흉내 내던 그는 그렇게 복싱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나의 은인, 심영자 사모님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별명 ‘짱구’는 그의 이름 ‘정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생긴 호칭이었다. 천방지축이었던 그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싸움이라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그가 복싱에 흥미를 느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열두 살 짱구는 어머님께 조르고 졸라 1500원을 얻어 부산 극동체육관에 입문했다. 그는 “나에겐 공부가 아니라 복싱이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열네 살 때에는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데뷔해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꼬맹이치고는 제법이었다. 하루는 체육관에 ‘소매치기 복서’로 불리던 故 김성준 선수가 방문했다. 스파링 상대를 찾던 도중 장정구가 파트너로 지목됐고 이 사건은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하는 데 물꼬를 틀어준 계기가 됐다.
“당시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님의 부인인 심영자 사모님이 김성준 선수를 후원하고 계셨어요. 그날 사모님의 오빠인 심준섭 씨가 구경하러 오셨는데 스파링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추천을 한 거죠. ‘부산에 짱구라는 놈이 있는데 눈여겨봐라’ 하고 말이죠.”
이후 문덕만 내외는 장정구의 두 주먹을 믿었고 그가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택으로 불러들여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정구는 마치 친아들처럼 자신을 돌봐준 그녀를 ‘어머니’,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스무 살 장정구, 정상에 오르다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한 뒤 드디어 첫 번째 타이틀전이 잡혔다. 상대는 8차 방어를 기록했던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다(Hilario Zapata).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경기를 12라운드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판정패. 프로 데뷔 2년 만에 처음으로 당한 패배이자 18전 18승 무패 행진이 깨진 날이기도 했다. 분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날의 패배가 이후 15차 방어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시합 올라가기 전에 대충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싸웠거든요. 근데 한 번 지고 나서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거죠. 지고 난 이후론 상대방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어요.”
운이 좋게도 사파다와의 재대결이 성사됐다. 1983년 3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은 4000명이 넘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마치 그가 이길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심이 장정구에게 다가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3라운드 만에 KO승이었다.
“챔피언이 되던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우연히 위를 올려다봤는데 뿌옇게 보이는 게 마치 꿈결 같았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는데 귀는 윙윙거리고, 당시에는 실감이 잘 안 났어요.(웃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세월 참 빠르죠.”
열다섯 번을 지켜낸 챔피언 벨트
타이틀 방어전만 15차까지 치른 그다. 분명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터. 챔피언이 되던 순간이 최고였다면 최악의 상황은 언제였을까. 그는 일본 도카시키 가쓰오(渡嘉敷勝男)와의 4차 방어전을 꼽았다. 이 경기는 복싱 팬들이 꼽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포항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기온이 35℃까지 올라간 날이었어요. 게다가 몸무게는 14kg이나 뺐지, 날씨는 너무 덥지, 상대는 쓰러지지도 않지… 경기 후반엔 냅다 도망가고 싶었죠.”
1라운드부터 수십 번의 주먹이 오고 갔다. 1라운드 종료 직전엔 다운을 얻어냈지만 도카시키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맞으면 맞을수록 지독하게 더 달라붙었다. 경기 후반엔 때리다 지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정도였다.
“정말 징그러운 선수였어요. 마음 같아선 주저앉고 싶었는데 하필 광복절이 지난 지 3일밖에 안 된 날이었거든요. 일본인하고 겨룰 때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포기하면 국민한테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온힘을 다해 싸웠죠. 이기고 나서 엎드려 우는데 탈진돼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힘을 쏟고 나면 그는 항상 혈뇨를 봤다. 경기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경기 전까지 이어지는 체중 관리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컸죠. 특히 갈증과의 싸움. 물을 한 모금만 마셔도 체중이 변하니깐요. 공부할 때 여자를 돌같이 보라고 하잖아요. 복싱선수들은 물을 돌같이 봐야 합니다.”
일명 ‘김밥 세 조각’ 사건이 있다. 그가 스파링을 준비하고 있는데 트레이너가 먹고 있는 김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결국 사정사정해서 세 조각을 얻었다. 스파링이 끝나면 먹으려고 고이 모셔놨는데 김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다. 범인(?)은 체육관 동료. 동료고 뭐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같이 성질을 내고 그대로 체육관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김밥 세 조각이 뭐라고… 그런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죠. 못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김밥 세 조각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체중과의 싸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내복에 땀복을 입고 뛰어야 했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또 비 오는 날이라고 운동을 쉴 순 없잖아요. 그럼 반포터미널로 가는 거예요. 그곳 지하에서 뛰는데 먼지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집에 와서 가래를 뱉으면 시커맸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운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짠합니다.”
은퇴 그리고 복귀
16차 방어전을 앞두고 장정구는 챔피언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챔피언 벨트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각종 개인사가 겹치면서 복싱을 계속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싱을 그만두니 경제적인 문제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1989년 다시 링으로 복귀한 장정구. 그러나 움베르토 곤살레스(Humberto Gonzalez)와의 재기 전에서 판정패를 당하고 1990년과 1991년 연달아 패배하며 42전 38승 4패의 전적에 3패의 오점을 보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선 KO패를 당하며 사실상 복서생활을 마감했다.
“복싱선수에게 가장 창피한 일은 지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복귀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복싱뿐이었으니깐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복싱밖에 몰랐어요. 장정구에게 복싱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현재 그는 ‘장정구복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운동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점점 뒤안길로 밀려나는 듯한 복싱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시합 때 찍은 사진, 시상식 때 찍은 사진, 그 수만 해도 엄청나거든요.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1980년대 복싱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장정구 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입장료는 받아야죠. 비싸진 않을 거예요. 대신 모든 수익은 불우이웃에게 쓰이는 걸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꽤 괜찮은 계획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