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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기사입력 2016-05-18 15:41

▲필자는 안고 계시는 어머니. 손웅익 동년기자
▲필자는 안고 계시는 어머니. 손웅익 동년기자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성적표. 손웅익 동년기자
▲초등학교 성적표. 손웅익 동년기자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사십년 만에 찾아낸 초등학교 친구. 손웅익 동년기자
▲사십년 만에 찾아낸 초등학교 친구. 손웅익 동년기자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설계 작품들. 손웅익 동년기자
▲필자의 설계 작품들. 손웅익 동년기자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IMF 때 필자 모습(왼족 사진)과 현재 모습. 손웅익 동년기자
▲IMF 때 필자 모습(왼족 사진)과 현재 모습. 손웅익 동년기자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의 사진첩. 손웅익기자
▲필자의 사진첩. 손웅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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