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청년이 가진 현실적인 자산

가성비-가심비-시성비로 이어진 트렌드
한때 소비의 기준은 ‘가성비’였다. 같은 돈이라면 더 좋은 성능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이후 ‘가심비’라는 말이 등장했다. 가격 대비 성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심리적 만족이 크다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기준이 등장했다. ‘시성비’다. 시간 대비 성능, 즉 같은 시간에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따지는 개념이다.
가성비와 가심비는 모두 ‘돈’을 중심으로 한 판단 기준이다. 시성비는 ‘시간’을 중심에 둔다. 월급을 주는 정규직보다 알바에 익숙한 이들에게 ‘시급’은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가늠자다.
새벽시간 배달 서비스나 줄서기를 대신해주는 알바, 짧은 시간에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온라인 강의까지 시간을 줄여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서비스가 다양해지고 있다. 기다리거나 준비하는 시간을 아끼고, 필요한 정보만 빠르게 얻는 선택이 점점 늘어난다.

버텨온 시간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소비 트렌드처럼 보이지만, 시성비라는 말에는 청년 세대의 시간 감각이 담겨 있다. 최근 늘어난 ‘쉬었음 청년’ 현상도 이런 환경 속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다. 청년층의 취업 과정만 봐도 그렇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구직 활동을 하지 않고 특별한 이유 없이 쉬고 있다”고 응답한 청년층이 증가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들이 졸업 후 첫 임금근로 일자리를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11개월 안팎이다. 취업까지 자산 없이 버티며 시간을 보내는 청년층은 ‘시간만이 유일한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시니어가 청년들이 일을 기피한다고 해석하고 의문을 갖는다. “왜 지원서를 낼 시간에 놀고 있지?”, “요즘 청년들은 노력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장기간 ‘쉬었음’ 상태인 청년 상당수가 그 이유를 ‘적합한 일자리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즉 태도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 구조와도 연결된 현상이라는 의미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시간을 들여 경험을 쌓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었다. 직장에서의 연차는 숙련을 의미했고, 숙련은 임금과 지위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많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널리 통용됐다.
하지만 청년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확산으로 직무 구조가 바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청년층 사이에서는 ‘얼마나 오래 버텼는가’보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시간을 오래 들여 축적하는 방식보다,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더 효율적인 결과를 얻는 선택을 추구한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실패(가능성)를 회피하는 성향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금처럼 쓰는 건 시니어도 마찬가지
이런 배경 속에서 청년들이 시성비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존중받고 싶다’는 의미에 가깝다. 불필요한 대기 시간이나 형식적인 절차, 장시간 회의에 거부감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간을 들인 만큼 의미 있는 결과가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시니어가 이들과 협업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상대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 신뢰 형성도 훨씬 빨라진다. 짧고 명확한 소통, 핵심 중심의 대화, 결과 중심의 협업 방식이 효과적인 이유다.
세대마다 강점이 다르다. 기술 변화의 속도에서는 젊은 세대가 더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흐름과 인간관계의 맥락을 읽는 능력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 청년이 빠른 실행과 효율을 중시한다면, 시니어는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넓은 시야에서 보여 줄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대와 오래 관찰해 온 세대가 서로의 강점을 보완할 때 관계는 균형을 갖는다. 그래서 조언의 방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나 때는 이렇게 했다”는 말보다 “그 선택이 너에게 어떤 경험과 시간을 남겨 줄까?”라는 질문이 더 도움이 된다. 경험을 권위로 제시하기보다 사고의 방향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시성비는 특정 세대의 취향이라기보다, 시간을 바라보는 사회의 변화에서 등장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시니어 또한 시간이 누구보다 중요한 세대다. 변화 속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세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 감각을 이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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