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다! 손주경제] ‘주는 기쁨’과 ‘내 인생’ 그 사이
손주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돈으로 표현할 때가 있다. 어린이날 선물을 고르거나 함께 외출할 때도 그렇다. 때로는 ‘이번은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지갑을 연다. 그런데 손주를 향한 마음은 좀처럼 ‘이번 한 번’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손주 경제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얼마나 더 해줄 수 있는가’보다 ‘이렇게 주는 방식이 내 삶을 해치지 않고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를 살펴볼 때다.

자식과 손주에게 시간과 비용 쓰는 문화
3월 26일 비바브라보클럽 강연장에서 강창희 행복100세자산관리연구회 대표는 노후를 위협하는 다섯 가지 리스크를 설명하다가 힘주어 말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바로 자식 문제, 자녀 리스크입니다.” 현장에 있던 청중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
강 대표는 한국이 세계적으로도 자녀에게 많은 돈을 쓰는 사회라고 짚으며, 성인이 된 뒤에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자녀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모 세대의 노후자금이 자녀와 가족 지원으로 계속 빠져나가는 구조를 경고한 것이다.
이야기는 손주 세대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녀의 결혼과 주거, 생활비를 돕는 데서 끝나지 않고, 손주 돌봄과 교육, 체험비와 용돈까지 아래 세대로 지원이 연장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녀 리스크’는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 지원이 끝없이 이어질 때 생기는 노후의 불안으로 읽을 수 있다.
같은 ‘조부모’라도 상황은 모두 제각각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을 개인의 과한 정이나 판단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5월 발표한 이슈페이퍼 ‘가족 의존적 돌봄과 부양 현실을 보여주는 조손가족의 특성과 정책 지원 방안’은 지금의 현실을 ‘가족 의존적 돌봄과 부양’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보고서는 다양한 가족 형태가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족에게 개인의 부양과 돌봄의 1차 책임이 부여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조손가족이다. 자료에 따르면 조손가족은 경제•주거•건강•심리·정서•법률 등 생활 전반에서 자원이 취약하다.
조부모는 손자녀를 돌보는 과정에서 외출이 자유롭지 않거나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관계도 자녀와 공공기관 정도로 한정된다. 조손가족 조부모 응답자의 27.7%만 경제활동에 참여했고, 조손가족이 된 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53.4%에 이르렀다. 손주를 위한 시간과 비용의 부담이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어떤 조부모에게는 손주 경제가 소비가 아니라 생계와 돌봄 그 자체라는 점을 이 자료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손주 경제를 말할 때 ‘조부모’라는 집단을 평균치로만 다루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이에게 손주 소비는 여행과 공연, 체험 활동처럼 기쁜 선택의 문제다.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교 후 식사 챙기기, 병원 동행, 생활비 보조처럼 피할 수 없는 생활의 문제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의 사회적 관계망 연구들은 독거노인•여성 노인•저소득 노인•조손가족•노인 등 취약한 조건에 놓인 집단을 별도로 다뤄야 할 만큼 노년층 내부의 격차가 크다고 지적해왔다. 따라서 손주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한국 노년층은 대체로 이렇다’는 식의 일반화보다, 손주 사랑이 소비와 돌봄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사랑은 기쁨이지만, 동시에 부담일 수도
그렇다고 손주를 위한 지출을 모두 경제적 부담이나 위험으로만 읽을 수도 없다.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은 분명 보람이고 기쁨이다. 실제로 노후의 삶은 돈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강창희 대표가 강연에서 반복해 강조한 것도 돈, 건강, 외로움이라는 노후의 세 가지 불안이었다.
손주를 돌보고 손주에게 쓰는 일이 기쁨이 되는 이유 역시, 그 안에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손주 경제는 단순히 지출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그 역할이 내 삶을 모두 집어삼킬 만큼 커질 때 보람은 부담으로 바뀌기 쉽다.
지금의 노년은 결코 여유로운 토대 위에만 서 있지 않다. 통계청의 ‘2024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2023년 가구주가 65세 이상인 노인가구는 565만 5000가구로 전년보다 32만 3000가구 늘었다. 2024년 19세 이상 국민 가운데 ‘외롭다’고 느끼는 비중은 21.1%,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느끼는 비중은 16.2%로 모두 전년보다 증가했는데, ‘외롭다’고 느끼는 비중은 60세 이상에서 가장 높았다. 동시에 ‘삶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중은 75.6%,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비중은 76.3%로 나타났다.
이 숫자들은 한국의 노년이 단순히 불행하거나, 반대로 충분히 안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외로움과 고립의 위험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삶의 만족과 역할의 의미를 붙들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손주를 위한 소비와 돌봄을 ‘좋은 일’로만 밀어붙일 수 없다. 내 삶의 만족을 지키는 조건과 손주에게 쓰는 시간과 돈이 충돌하는 순간이 분명히 생기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2월에 발표한 ‘초고령사회와 생애 말기 필수산업의 활성화’ 보고서도 같은 방향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독거노인 비율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높아지는 반면, ‘부모의 노후 생계를 가족이 돌봐야 한다’는 인식과 ‘장기적 도움이 필요할 때 자녀 세대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비중은 모두 낮아졌다.
가족이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규범은 약해졌고 자녀에게 기대하는 마음도 줄었는데,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돌봄 공백은 더 커지고 있다. 결국 제도와 시장이 다 메우지 못한 빈자리를 가족, 그중에서도 조부모가 메운다. 가족이 더는 전통적 의미의 부양 단위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위기 앞에서는 가족이 마지막 안전망이 되는 사회인 셈이다.

‘얼마나’보다 ‘얼마나 오래’가 중요하다
한 번의 선물, 한 번의 여행, 한 번의 특별한 지원은 누구에게나 기쁨일 수 있다. 하지만 매달 이어지는 용돈, 습관처럼 반복되는 체험비 지원, 주기적인 돌봄과 식사 챙김은 전혀 다른 문제다. 손주에게 지원이 반복될수록 조부모 자신의 여가, 건강관리, 사회적 관계망은 조금씩 줄어들 수 있다. 통계청이 2025년 3월 발표한 ‘2024 한국의 사회지표’에서 2024년 국민의 평균 여가 시간은 늘었고, 여가 여건 충족도도 전년보다 개선됐다. 한편 가장 많이 참여한 여가 활동을 혼자 한 비중이 54.9%로 가장 높았다. 이 수치들을 조합하면, 삶을 유지하는 데 자기만의 여가 시간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손주 경제의 중요한 기준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점검이다. 내 건강과 여가, 인간관계를 줄여가며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손주에게 좋은 할머니•할아버지가 되려고 내 삶을 위축시키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노후의 기준, ‘남길 것인가, 다 쓸 것인가’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는 자신의 자산을 자녀나 손주에게 최대한 남기기보다, 본인이 쓰고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인식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아끼고 남기는 것이 노후의 미덕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은 ‘내 삶을 누리는 것’ 또한 중요한 가치가 됐다.
그러나 이 변화 역시 단순하지 않다. 의료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고 기대수명은 길어지고 있지만, 노후의 끝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살지, 돌봄과 의료 비용이 길게 이어질지, 어느 시점부터 삶의 패턴이 달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 필요한 것은 ‘다 쓰고 가겠다’거나 ‘끝까지 남기겠다’는 극단적인 태도가 아니라, 어떻게 나누어 쓰고 균형을 잡을지 고민하는 현명함이다.
손주와의 관계를 줄일 필요는 없지만, 방식은 달리할 수 있다. 꼭 돈을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이 식사하고, 산책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기억으로 남는다. 손주가 어릴수록 누구와 시간을 보냈는지가 더 오래 기억된다.
‘더 많이’, ‘더 희생해서’가 아니라 ‘더 오래’, ‘더 기쁘게’로. 손주를 위해 쓰는 돈도, 나를 위해 남겨두는 시간도 모두 삶의 일부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유지하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이때야말로 손주 경제는 희생이 아니라, 세대 간 이해와 공감을 넓히는 연결의 경제가 될 수 있다.

손주 사랑, ‘오버’는 아닐까?
손주를 위해 쓰는 돈 때문에 내 생활비를 줄이고 있다.
지갑 사정 때문에 건강검진, 병원 진료, 운동 등 내 건강관리를 미룬 적이 있다.
손주 돌봄을 이유로 여행이나 취미, 친구 모임을 포기한 적이 있다.
손주에게 주는 용돈이나 선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녀와 충분히 상의하지 않고 선물이나 용돈을 지원한 적이 있다.
한번 시작한 지원을 줄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손주에게 해주지 못하면 미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낀다.
손주를 위한 지출이 ‘기쁨’보다 ‘부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예’라고 답한 질문의 수가
- 0~2개라면
: 현재 비교적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 3~5개라면
: 지출 방식이나 빈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 6개 이상이라면
: 손주 소비가 내 삶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있다.
관련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