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속 세상]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수상 소감과 새로운 정체성.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매기 강 감독이 수상 소감으로 꺼내놓은 “전 세계 모든 곳의 한국인”이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울림을 줬다. 이 말은 현재 K-컬처의 영역 안에서 맹활약하는 전 세계 한국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수상 소감에 담긴 의미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사는 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한국인’의 사전적 의미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문화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정의가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한국계 캐나다인 여성 감독 매기 강의 발언이다. 그는 “나와 닮은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미안하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며 “이 상을 한국과 전 세계 모든 곳의 한국인에게 바친다(This is for Korea, and Koreans everywhere)”고 말했다. 이 표현은 이제 한국인이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사는 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대신 매기 강 감독 자신처럼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이른바 ‘한국계’까지 포괄한다는 선언이다.
4월 1일 서울에서 진행된 ‘케데헌’의 아카데미 수상 기념 기자간담회에서도 매기 강 감독과, 이 작품의 OST ‘골든(Golden)’으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작곡가이자 가수 이재는 자신들이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자부심을 털어놨다. 매기 강 감독은 ‘뮬란’ 같은 중국이나 일본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왜 한국 문화를 담은 애니메이션은 없는지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만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여겼고 또 만들고 싶어 ‘케데헌’을 기획했다는 거다.
매기 강 감독은 ‘교포’로 지내며 “나는 온전히 한국인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다행히 한국 문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상황이 그에게 기회가 됐다. “한국과 해외 양쪽의 문화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드러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한국 문화의 일부이며, 결코 우리의 한국인 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장하면서 온전히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재 역시 달라진 한국 문화를 향한 자부심을 털어놨다. 삶의 반은 미국에서, 반은 한국에서 살며 가수가 꿈이었던 이재는 K팝을 사랑했지만, 그것 때문에 미국에서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완전히 정반대 풍경을 보여줬다. 판소리와 북소리, 한국의 전통무용으로 ‘골든’ 무대를 연출했다. 그러자 그곳을 가득 메운 배우·감독들이 노래를 따라 하고 응원했다. 이재는 그 광경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감독의 정체성 고민과 ‘케데헌’의 탄생
매기 강 감독이나 이재에게 ‘케데헌’의 수상이 각별한 의미인 건 이 작품 자체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어서다. ‘케데헌’의 주인공 루미가 바로 그 정체성의 고민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루미는 인간인 어머니와 악령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몸에 남다른 표식이 있다. 그래서 친구들과 목욕탕도 함께 가지 못한다.
“난 존재 자체가 실수지.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루미의 이 대사는 매기 강 감독이나 이재처럼, 한국인과 서구인 그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겪는 혼돈을 대변한다. 결국 ‘케데헌’은 이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던 루미가 그 ‘두 개의 정체성이 바로 나’라고 인정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 등장하는 노래 ‘골든’의 가사가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주어진 두 개의 삶, 양쪽 모두에 충실하려 했지만 내 자리를 찾지 못했어. 문제아라 했지. 거친 성격 탓에. 하지만 그게 날 여기까지 이끌었어. 끝없이 무대에. 더는 숨지 않아. 찬란한 나. 이게 내 모습이야.”
지 이끌었어. 끝없이 무대에. 더는 숨지 않아. 찬란한 나. 이게 내 모습이야.”
‘케데헌’이 전하는 이 메시지는 사실상 방탄소년단(BTS)이 노래에 담아 전하는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사랑하라)’와 맞닿아 있고, 그것은 또한 K팝 팬덤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전 세계 K팝 팬들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모임으로 시작했다. 대부분 비영어권의 유색인 K팝 팬들이었고, 영어권의 백인이라 해도 주류사회에서 소외되던 비주류들이 팬으로 뭉쳤다. BTS 같은 변방의 아티스트가 비주류로서 그들을 대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BTS가 ‘러브 유어셀프’를 외칠 때 이들 팬은 그걸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열광했다. 결국 K팝 팬이었던 매기 강 감독과 이재가 ‘케데헌’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메시지를 당당히 드러낸 건 우연히 일어난 기획의 성과가 아니다. 그건 그들의 진정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진정성은 결국 통했고,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끝내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인정받는 결과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하는 한국인들
매기 강 감독이나 이재의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할라우드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는 한국계 아티스트들을 통해 그 전조를 보인 바 있다. 윤여정 배우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여한 영화 ‘미나리’의 한국계 감독 정이삭은 그 신호탄이었다. 1980년대 미국 아칸소주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정 감독 가족이 겪은 경험담이다. 이민자들이 겪는 적응의 고통과 가족애라는 보편적인 서사로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나리’에 나온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출연해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도 이민자들이 협업한 작품이다.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에는 스티븐 연, 조셉 리 같은 한국계 배우들이 출연했다. 에미상 8관왕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낸 이 작품은 4월 16일부터 시즌2가 방영 중이다. 윤여정과 송강호도 합류해 기대를 높이고 있다.
애플에서 1000억을 투자해 제작한 시리즈 ‘파친코’ 역시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재일 한인들의 세대에 걸친 이야기로, 이민 1.5세대인 이민진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한인 이민자 같은 소수 집단을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서구의 관점을 ‘똑같은 인간’의 관점으로 바꿔놓은 데 있다. 이들도 인간의 슬픔·연대·사랑을 갖는 보편적 존재라는 걸 작품 안에 녹인 것이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시리즈는 윤여정, 이민호, 김민하 같은 한국인은 물론이고 진하, 박소희 같은 한국계 배우들, 지미 심슨 같은 미국 배우가 두루 참여한 다국적 프로젝트가 됐다. 이 작품을 연출한 코고 나다, 저스틴 전 감독은 모두 한국계다.
또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등에 노미네이트됐던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주해 정착한 인물이다. 한국 이름은 송하영이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넘버3’로 익숙한 송능한 감독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이민자들의 삶이 전생(이민 전 한국에서의 삶)과 현생(이민 후 타국에서의 삶)으로 나뉘는 것 같은 경험이라는 걸 담담하지만 애틋한 러브스토리로 담았다. 셀린 송 감독은 최근작 ‘머티리얼리스트’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의 영역에서 확장하고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
글로벌 콘텐츠 업계에서 일어나는 ‘한국계 아티스트’들의 선전과, 그들이 말하는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한국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정치적·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그 실질적인 삶을 경계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국적과 관련한 법적 차원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세계가 같은 콘텐츠로 공감하고 교류하는 문화의 차원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국가 같은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정체성으로 삼는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새로운 한국인의 범주가 가능해진다.
한국계 아티스트들이 작품에 담아내는 한국 문화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아오게 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케데헌’의 성공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외국인들의 오픈런 현상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장본인을 국적과 물리적인 경계를 내세워 한국인이라 부르지 않는 건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 아닐까.
이질적인 두 문화 사이에서 그 양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가는 글로벌 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 문화의 가교 역할을 이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기 강 감독이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광을 “전 세계 모든 곳의 한국인에게” 바치는 그 순간은 더더욱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경의 물리적 장벽을 해체하고 문화적·정서적 유대로 묶인 새로운 의미의 ‘한국인’의 탄생을 알렸다. 이제 세계 모든 곳의 한국인이 한국 문화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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