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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단상

기사입력 2016-08-22 18:03

작은 가슴에 기쁨과 희망, 좌절도 품고 산다. 마치 뷔페식당처럼 한 접시에 담겨 있다. 세 가지 이상의 물감을 섞으면 탁한 색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지하철도 그런 것 같다.

붐비는 시간이었다. 옷차림도 산뜻한 말쑥한 청년이 내 뒤에 섰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 그 일은 제가 처리 못 했는데요. 그럼요 제가 해야죠. 당연하죠. 안심하세요. 곧 처리하겠습니다.”

아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들렸다.

“ 아, 미친 새끼. 어디에다 지랄이야.”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한참을 육두문자를 쏟아 내었다. 그의 세련된 차림과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40대로 보이는 여자가 전화를 받으며 지하철에 올랐다. 몇 정거장을 지나도록 통화는 계속되었다. 집안일이며 식구들, 요리에 관한 이야기까지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머리가 어찔거리기 시작해서 몇 사람이 그 여자를 돌아다보았다. 필자는 듣고 싶지 않아도 그 여자네 저녁 메뉴를 다 들어 버렸다. 장을 봐서 식탁에 오르는 과정만큼이나 길었다.

머리가 흰 할머니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자 앞에 앉았던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가 극구 사양하며 다시 앉으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금방 내린다며 앉으시게 했다. 그러나 청년은 금방 내리지 않았다.

노출이 심한 여성이 자리에 앉더니 화장을 시작했다. 파운데이션을 두드려 바르더니 볼 터치를 했다. 눈을 치뜨며 마스카라, 속눈썹까지 올리고,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서야 화장케이스를 넣었다. 필자는 구경 잘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일 때마다 걱정되었다. 속이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아주 앳되어 풋내가 날 것 같은 남녀가 탔다. 문 앞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섰다. 남자는 가만히 서 있는데 여자가 남자를 끌어안고 턱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고 뭐라 속삭였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나이 지긋한 연배는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 집에 가서 오늘 본 것을 한마디 할 것 같다.

술 없이도 취하는 나이가 20대고, 병 없이도 아픈 나이가 20대 아니던가? 어리석음조차도 젊음의 특권이다.

아주머니가 시장을 본 듯 보따리를 들고 탔다.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필자에게 걸어온다.

마늘이 하도 싸서 샀는데 장아찌를 담그려고 한다. 아들, 며느리가 잘 먹어서 그래야 한다고. 자기는 어디서 내리는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온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데 옆자리의 아주머니만 깨어 있는 것 같다. 마치 시골 장터에서 만난 사람 같다. 사람 있는 곳에 희로애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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