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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여자로 살아가기

기사입력 2018-08-06 08:43

▲대한민국 여성(박미령 동년기자)
▲대한민국 여성(박미령 동년기자)

한낮의 태양이 뜨겁다. 교회 봉사 일정을 끝내고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다가 화장실이 급해 가까이 있는 사회봉사관에 들렀다. 주중이라 사람이 없어 텅 빈 건물은 불이 꺼져 있다. 일단 불을 켜고 여자 화장실로 찾아 들어가는데 웬 중년 남자가 뻘건 목장갑에 오른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온다. 얼른 화장실 문을 잠그고 동태를 살피니 화장실 바로 옆 칸으로 들어가 무엇인지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 나는 급히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필시 위험한 상황일 것으로 판단한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112에 구조요청을 했다.

“여기 합정동에 있는 OO 교회 사회봉사관 화장실인데 옆 칸에 이상한 남자가 있어요.”

말이 끝나자 옆 칸의 남자가 화장실 벽을 치며 소리쳤다.

“저 이상한 남자 아니에요. 여기 직원이에요. 지금 변기 뚜껑 수리 중이니 전화 끊으세요.”

아뿔싸! 이걸 어쩌지.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미안하기는 했으나 당시의 공포도 엄연한 사실이므로 문도 열지 못한 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미리 양해를 구하시지 아무 말 없이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니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는 피식 웃는 소리를 내며 “아 미안합니다. 미쳐 말을 못 했네요”라고 말한다.

“저도 죄송해요. 오해해서····.”

그래도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아저씨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대낮에 벌인 별것 아닌 해프닝이었지만, 오며 생각하니 웃을 수만은 없는 사건이었다. 이 나이에도 내면에 아직 그런 공포가 숨어 있다니.


‘재미난 지옥’ 대한민국엔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다. 북한과 미국의 밀고 당기는 회담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청년들의 취업전선은 갈수록 팍팍하고 이젠 자영업자들마저 거리로 나섰다. 그런 와중에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선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페미니즘 전선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가 가시지 않은 혜화역 부근에 무려 3만여 명의 여성들이 모인 것이다.


광우병으로부터 시작해 촛불 집회까지 남녀가 모두 참여한 집회를 제외하고 여성들만의 이슈로 이만큼 모인 것은 유례가 없을 듯하다. 열기도 뜨겁고 수위도 높다. 그러다 보니 과격해지고 본질에서 벗어난 일탈도 눈에 띈다. 예컨대 종교까지 끌어들여 대립한 것은 좀 과한 느낌이다. 게다가 인터넷으로까지 싸움이 번져 ‘여혐’, ‘남혐‘으로 나뉘어 무슨 게임 배틀 하듯이 싸우는 모습은 보기 딱할 지경이다.


그러나 싸우는 방법이 서툴고 잠시 방향이 빗나가더라도 그 안에는 분명하고 타당한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모 시인이 자신을 공격한 여성 시인을 고소한 사건이 보여주듯 이런 사태를 촉발한 ‘미투 운동’도 어느새 흐지부지되고 도리어 일부에서는 역공격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여성들이 느끼는 뿌리 깊은 분노와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디 물리적 힘의 열세가 사회적 열세로 진화하고 제도적 인습으로 공고히 자리 잡은 것이 남녀 차별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핵심은 폭력이다. 지금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폭행 등 야만적 폭력이 모든 사태의 근본인 것이다. 페미니즘으로 포장되어 엉뚱한 논쟁으로 비화하지 말고 오로지 폭력 한 가지만 해결해도 많은 문제가 해소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맹수가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경우는 있어도 배우자를 해하는 일은 없다. 오직 인간 세상에서만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야만이 자행된다. 여성들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 잡은 폭력에의 두려움을 법과 제도로 지켜주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실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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