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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기침소리

기사입력 2019-04-01 08:22

[동년기자 페이지] 동년기자들의 아침맞이

올해 고등학생이 된 셋째 아이는 봄방학 동안 늦잠이 습관이 됐다. 잠이 부족한지 아침마다 “10분만 더!”를 외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하루는 깨우다 지쳐 “일찍 일어날 자신 없으면 밤에 일찍 자! 엄마는 너보다 늦게 자는데 아침에 벌떡 일어나잖아!” 했더니 아이가 이불을 젖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한마디한다.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대.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그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툭 던지는 녀석의 말이 미워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었다.

사실 요즘은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진다. 행여 잠든 식구들이 깰까봐 미리 알람을 끌 때가 많다. 문득 돌아가신 시할머니 생각이 난다. 시할머니는 아침잠이 없었다. 명절이면 시댁에서 하루나 이틀을 머물렀는데 나는 예민한 탓에 밤마다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 일쑤였다. 새벽녘이 되어 깜빡 잠이 들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루를 걷는 종종걸음 소리에 이내 잠이 깼다.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는 너무 일찍 일어났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시댁의 아침은 늘 그렇게 시작됐다. 종종걸음으로 마루를 걸어 마당으로 나가는 시할머니 발소리로 시작해 킁킁 기침소리, 머리맡에 둔 요강 소리 등이 조용한 시골집 아침의 정적을 깼다. 대개 오전 5시도 채 안 된 이른 아침의 소리였다. 시할머니는 방문을 지날 때마다 기침을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그대로 누워 있기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시어머니가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켜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마루의 소음들은 이제 그만들 일어나라는 시할머니만의 신호였다. 시어머니를 깨우고 나를 깨우고 잠든 아침을 깨우는 소리였다. 그렇게 우리를 깨운 뒤에는 역할을 끝낸 듯 개조한 주방 한쪽에 앉아 무심히 담배를 피우시곤 했다. 60세에 먼저 보낸 큰딸을 잊지 못해서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담배를 피우셨다. 가로등이 없어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집 주방에서 여자 셋은 늘 그렇게 명절 아침을 맞았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도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할머니 역할을 대신했다. 컴컴한 새벽을 여는 여인네들의 기침소리는 며느리를 깨우는 신호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 하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더 이상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침소리 대신 휴대전화 알람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때때로 그분들의 기침소리가 그립다. 점점 커지던 시할머니의 기침소리, 시어머니가 일부러 내는 “큼큼” 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다.

젖힌 커튼 사이로 새벽이 보인다.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갈아 미리 준비한 드리퍼에 넣는다. 입구가 좁고 긴 커피 주전자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에 닿으면 몽글몽글 거품이 일어난다. 커피 향도 한가득 올라온다. 까맣게 일렁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기분이 좋다. 1cm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숨어드는지 치링치링 풍경이 운다. 시할머니 기침소리, 시어머니가 큼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침이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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